본문 바로가기
Who'sWho in Ancient Korea

작제건作帝建, 고려왕조의 뿌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7. 24.
반응형

고려를 창업한 태조 왕건의 조부. 신라시대 말기를 산 인물이지만, 그 남은 행적이 신이神異로 일관해, 자세한 경력은 알기가 어렵다. 태조 2년(919)에 왕건이 선대 직계 조상들을 일괄 추존하면서 할아버지인 그를 의조 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이라 하고, 그 부인은 원창왕후元昌王后했다. 이로 보아 고려 건국 이전에 작제건은 죽고 없었음에 틀림없다. 

 


帝王韻紀 > 帝王韻紀 卷下 > 本朝君王世系年代 > 自古受命君, 孰不非常類



自古受命君, 孰不非常類
   本朝君王世系年代凡七百言.
自古受命君, 孰不非常類. 惟我皇家系, 於此尤奇異. 唐肅潛龍時, 遊賞東山水. 禮彼八眞仙, 寄宿松山趾.唐書曰, “肅宗少封忠王.” 本朝學士洪瓘, 所撰世紀曰, “唐忠王, 遊松岳山, 禮八眞仙, 宿養子洞居士寶育家.” 則肅宗來遊明矣. 又按本紀, “龍王謂景康曰, ‘欲西去大唐, 見天子之父乎?’” 則英驗已著. 或以唐書無明文爲難者, 過矣. 且唐之史臣, 豈以副君潛遊外國之事, 筆之於矯書之文耶? 無明文, 理然. 聖骨將軍諱虎景, 今九龍山天王也. 初自白頭山率九人, 遊獵而來. 因獵而宿於山穴, 有虎來吼而不去. 十人議曰, “此必有由.” 各持衣物投之, 則虎受將軍之衣. 將軍出, 而穴陷, 九人同沒. 虎變爲女曰, “我寡居此山, 願與君同理神政.” 因婚而爲神. 由是, 名虎景, 而山名九龍. 蓋本山精也. 孫, 有女賢而美.諱辰義, 諡貞和王后. 父元德大王, 諱寶育. 祖松岳郡沙粲諱康忠. 曾祖聖骨將軍也. 母諱德周, 外祖沙粲, 長子諱伊帝建也. 遂合生景康,大王諱, 作帝建., 善射無倫比. 欲覲天子父, 寄達商人艤, 及至海中央, 舟乃旋流止. 商人怪其然, 且卜而且議, 扶出置孤巖, 舟行如過鷙. 尋卽龍王出, 披誠陳所以, 爰有老野狐, 時時忽來此, 詐現佛威儀, 妖經紛說似, 我卽發頭痛, 此患難堪矣. 願子彈神弓, 爲我而除彼. 果如其所云, 斃之以一矢. 龍王復出謝, 引入深宮裏, 遂妻以長女,是爲景獻王后, 生四子二女, 其長子,  我世祖是也. 乞與金毛豕, 兼以七寶隨, 載送西江涘,今祠堂在焉, 親幸所也. 還來松岳居.今廣明寺也., 於焉誕聖智, 聖母智異山天王也 命詵師, 指此明堂謂, 斯爲種穄田, 因以爲王氏.俗呼穄爲王, 蓋言興王業也. 史臣曰, “自古聖人, 不係本宗, 而以德, 立姓者, 尙矣. 如帝舜之本, 姚氏, 而興於潙汭, 姓嬀, 光耿之本, 孟氏, 而指李, 爲姓, 仲尼之本, 子氏, 而母感乙鳥, 兼以取明爲孔者. 是也, 今亦然歟.” 世祖諱隆, 小宗龍建. 於羅時, 金城承錦寄, 弓裔自北原, 開國於是地. 移都鐵原郡.今東州也. 臣嘗守是州, 而再遊金城, 二邑人歷歷傳說.. 官人以百揆, 因仕裔之朝. 


자고로 천명(天命)을 받아 군왕(君王)이 되니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700언(言)이다.
자고로 천명(天命)을 받아 군왕(君王)이 되니, 〈그〉 누가 비범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우리 황가(皇家)의 계보도 이에 더욱 기이하다 할 것이다. 당(唐) 숙종(肅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동방의 산수를 유람하며 놀았다. 저 팔진선(八眞仙)에 예를 올리고 송악산(松岳山) 기슭에 이르러 기숙(寄宿) 하였네.『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숙종은 어렸을 때 충왕(忠王)에 책봉되었다.”라고 하였으며, 우리나라의 학사 홍관(洪瓘)이 지은 『세기(世紀)』에 이르기를, “당의 충왕이 송악산에서 놀다가 팔진선에게 예를 올렸고, 양자동(養子洞)의 거사(居士) 보육(寶育)의 집에서 유숙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즉 숙종이 〈송악에〉 와서 놀았던 것은 확실하다. 또한 『본기(本紀)』를 살펴보니, “용왕(龍王)이 경강(景康)에게 이르기를, ‘서쪽 대당(大唐)에 가서, 천자(天子)인 아버지를 보고자 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한 즉 영험함이 드러난 것이다. 혹 『당서』에 명확한 문헌이 없어서 〈알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당의 사신(史臣)이 어찌 태자[副君]가 몰래 외국을 유람한 일을 교서(矯書)의 글에 적었겠는가? 〈그러니〉 명확한 문헌이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성골장군(聖骨將軍)휘(諱)는 호경(虎景)이며, 지금의 구룡산천왕(九龍山天王)이다. 처음에 백두산(白頭山)에서 9명을 데리고 사냥하러 〈송악에〉 왔다. 이로 인하여 사냥을 하다가 산혈(山穴)에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호랑이가 〈동굴에〉 와서 울부짖고는 가지 않았다. 10인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각자 가지고 있는 의물(衣物)을 던지니, 호랑이가 장군의 옷을 받았다. 장군이 나오니 동굴이 무너져 9인이 모두 파묻혔다. 호랑이가 변신하여 여인이 되어 말하기를, “나는 과부로 이 산에 살고 있는데, 원컨대 당신과 함께 신정(神政)을 다스리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혼인하여 신(神)이 되었다. 이 때문에 호경이라 이름하였고, 〈그〉 산은 구룡이라 이름한 것이다. 〈이는〉 대저 산정(山精)을 근본으로 한 것이다.의 자손으로, 여자로서 현명하고 아름다운 이가 있었네.휘는 진의(辰義)이고 시호(諡號)는 정화왕후(貞和王后)이다. 아버지는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휘는 보육(寶育)이다. 조부(祖父)는 송악군(松岳郡)의 사찬(沙粲)이고 휘는 강충(康忠)이다. 증조부는 성골장군이다. 어머니의 휘는 덕주(德周)이고, 외조부는 사찬이며 장자는 휘가 이제건(伊帝建)이다.. 드디어 〈당 숙종과〉 합하여 경강을 낳았으니,대왕의 휘는 작제건(作帝建)이다., 〈그는〉 활을 잘 쏘고 비범하였다네. 천자인 아버지를 만나고자 상인의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배가 뱅뱅 돌며 멈추었네. 상인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점을 치고 모의하여 〈작제건을〉 외딴 바위섬에 내리게 하고는, 배는 지나가는 매와 같이 가버렸도다. 이윽고 용왕이 나와서 그 이유를 성심(誠心)으로 이야기하였는데, 어떤 늙은 여우가, 때때로 홀연히 여기에 나타나서, 거짓으로 부처의 위의(威儀)를 하고는, 요망한 경전을 어지러이 이야기하고 다니므로, 내가 두통이 나서 이와 같이 근심을 감당하기 어렵다. 원컨대 자네가 신궁(神弓)을 쏘아 나를 위하여 저것을 없애달라 하였네. 과연 그 말과 같이, 화살 1개로 여우를 죽였도다. 용왕이 다시 나와 사례하고, 용궁 안으로 그를 맞아들이고는 드디어 장녀이가 경헌왕후(景獻王后)이니 아들 넷에 딸 둘을 낳았는데, 그 장자(長子)가 우리 세조(世祖)이다.를 처로 삼게 하였다. 금으로 된 돼지를 줄 것을 청하니 칠보(七寶)를 더하여 주었는데, 서강(西江)지금 사당(祠堂)이 그 곳에 있고, 〈국왕이〉 친히 행차하는 곳이다.가로 실어보내니, 송악의 살던 곳지금의 광명사(廣明寺)이다.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성인의 지혜를 가진 아이를 낳았으며, 성모(聖母)지리산천왕(智異山天王)이다.가 도선국사(道詵國師)에게 명하여, 이곳을 명당이라 이르게 하고는, 이곳을 종제지지(種穄之地)로 삼았으니, 이로 인하여 왕(王)세간에 기장[穄]을 왕이라 일렀으니, 대저 왕업(王業)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 “자고(自古)로 성인(聖人)은 본종(本宗)에 얽매이지 않고 덕(德)으로 성씨를 세우는 것은 오래되었다. 순(舜) 임금의 본종은 요씨(姚氏)이나 규예(潙汭)에서 일어났으니, 성씨를 규(嬀)로 하였고, 광경(光耿)의 본종은 맹씨(孟氏)이나, 오얏[李]을 가리켜 성씨로 삼았으며 공자(孔子)의 본종은 자씨(子氏)이나 어머니가 을조(乙鳥)에 감화하여, 겸하여 그 밝음을 취해 공(孔)을 성씨로 삼은 것이 이것이다. 지금 또한 그러한 것인가?”라고 하였다.을 성(姓)으로 삼게 되었다. 세조(世祖)휘가 융(隆)이고 어릴 때의 이름은 용건(龍建)이다.가 신라 때에, 금성(金城)에서 성주(城主)가 되니, 궁예(弓裔)가 북원(北原)에서 이곳으로 〈옮겨〉 개국하였네. 철원군(鐵原郡)지금의 동주(東州)이다. 신(臣)이 일찍이 이 주(州)에서 수령을 하고 다시 금성에서 놀았는데, 두 읍의 사람들이 또렷이 말을 전해주었다.으로 천도하였도다. 〈궁예가〉 관인과 백관을 임명하니, 이로 인하여 궁예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였네. 

高麗史 高麗世系

正憲大夫工曹判書集賢殿大提學知經筵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臣】鄭麟趾奉敎修.
高麗之先, 史闕未詳. 太祖實錄, “卽位二年, 追王三代祖考, 冊上始祖尊謚曰元德大王, 妣爲貞和王后懿祖景康大王, 妣爲元昌王后世祖威武大王, 妣爲威肅王后.”

정헌대부 공조판서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대사성(正憲大夫 工曹判書 集賢殿大提學 知經筵春秋館事 兼 成均大司成) 【신(臣)】 정인지(鄭麟趾)가 교(敎)를 받들어 편수하였다.
고려의 선대는 기록이 빠져 자세하지 않다. 『태조실록(太祖實錄)』에 “즉위 2년(919)에 왕의 삼대조고(三代祖考)를 추존하여 시조의 존시(尊謚)를 책봉해 올리니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 하고 비(妣)는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였으며, 의조(懿祖)는 경강대왕(景康大王)이라 하고 비는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하였으며, 세조(世祖)는 위무대왕(威武大王)이라 하고 비는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金寬毅編年通錄云, “有名虎景者, 自號聖骨將軍.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左谷, 娶妻家焉, 富而無子. 善射以獵爲事, 一日與同里九人, 捕鷹平那山. 會日暮, 就宿巖竇, 有虎當竇口大吼.十人相謂曰, ‘虎欲啗我輩, 試投冠, 攬者當之.’ 遂皆投之, 虎攬虎景冠. 虎景出, 欲與虎鬪, 虎忽不見, 而竇崩, 九人皆不得出. 虎景還告平那郡, 來葬九人, 先祀山神, 其神見曰, ‘予以寡婦主此山. 幸遇聖骨將軍, 欲與爲夫婦, 共理神政, 請封爲此山大王.’ 言訖, 與虎景俱隱不見. 郡人因封虎景爲大王, 立祠祭之, 以九人同亡, 改山名曰九龍.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이르기를, “이름이 호경(虎景)이라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불렀다.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의 왼쪽 골짜기에 이르러 장가를 들고 살림을 차렸는데 집은 부유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활을 잘 쏘아 사냥을 일삼았는데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아홉 명과 평나산(平那山)에서 매를 잡았다. 마침 날이 저물어 바위굴에서 하룻밤을 묵으려 하는데 호랑이 한마리가 있어 굴 입구에서 크게 울부짖었다. 열 사람이 서로에게 말하기를, ‘범이 우리 무리를 잡아먹으려 하니 시험 삼아 관(冠)을 던져 〈호랑이가〉 잡는 것의 임자가 맞서기로 하자.’라고 하고, 드디어 모두 던지자 호랑이가 호경의 관을 움켜잡았다. 호경이 나가 호랑이와 싸우려고 하였는데, 호랑이는 갑자기 보이지 않고 굴이 무너져 아홉 명은 모두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호경이 돌아가 평나군(平那郡)에 알리고, 되돌아와 아홉 명의 장사를 지내려고 먼저 산신에게 제를 올렸는데 그 신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과부로서 이 산을 다스린다. 다행히 성골장군을 만나, 부부가 되어서 함께 신정(神政)을 다스리고자 하니 이 산의 대왕으로 봉하기를 청한다.’라고 하고, 말을 마치자 호경과 함께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평나군의 백성들은 그 때문에 호경을 봉하여 대왕으로 삼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 아홉 사람이 함께 죽었다 하여 산 이름을 고쳐 구룡산(九龍山)이라 하였다. 

虎景不忘舊妻, 夜常如夢來合, 生子曰康忠康忠體貌端嚴, 多才藝, 娶西江永安村富人女名具置義, 居五冠山摩訶岬. 時新羅監干八元, 善風水, 到扶蘇郡, 郡在扶蘇山北, 見山形勝而童, 告康忠曰, ‘若移郡山南, 植松使不露巖石, 則統合三韓者出矣.’ 於是, 康忠與郡人, 徙居山南, 栽松遍嶽, 因改名松嶽郡. 遂爲郡上沙粲, 且以摩訶岬第, 爲永業之地, 往來焉. 家累千金, 生二子, 季曰損乎述, 改名寶育寶育性慈惠, 出家, 入智異山修道, 還居平那山北岬, 又徙摩訶岬. 嘗夢登鵠嶺, 向南便旋, 溺溢三韓山川, 變成銀海. 明日, 以語其兄伊帝建伊帝建曰, ‘汝必生支天之柱.’ 以其女德周妻之. 遂爲居士, 仍於摩訶岬, 構木菴.

호경(虎景)이 옛 부인을 잊지 못하고 밤마다 늘 꿈같이 와서 교합하여 아들을 낳으니 강충(康忠)이라 하였다. 강충은 외모가 단정하고 근엄하며 재주가 많았는데, 서강(西江) 영안촌(永安村)의 부잣집 딸인 구치의(具置義)를 아내로 맞아 오관산(五冠山) 아래 마하갑(摩訶岬)에서 살았다. 그 때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이 풍수에 밝았는데, 부소군(扶蘇郡)에 이르러 고을이 부소산(扶蘇山) 북쪽에 있을 뿐 아니라 산의 형세는 빼어나나 나무가 없는 것을 보고는 강충에게 고하기를 ‘만약 고을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윗돌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 삼한(三韓)을 통합할 인물이 태어날 것이오.’라고 하였다. 이에 강충이 고을 사람들과 더불어 산의 남쪽으로 거처를 옮기고 온 산에 소나무를 심고 인하여 〈고을의〉 이름을 송악군(松嶽郡)이라 고쳤다. 마침내 〈강충은〉 고을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으며 또 마하갑의 집을 영업지(永業地)로 삼고서 왕래하였다. 집안에 천금을 쌓아두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막내는 손호술(損乎述)이라 부르다가 이름을 바꾸어 보육(寶育)이라 하였다. 보육은 성품이 자비롭고 은혜로웠는데, 출가하여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도를 닦고 평나산(平那山)의 북갑(北岬)으로 돌아와 살다가 또 마하갑으로 옮겼다. 일찍이 꿈에 곡령(鵠嶺)에 올라가 남쪽을 향해 소변을 보니, 삼한(三韓)의 산천이 오줌에 잠겨 은빛 바다로 변하였다. 다음날 그의 형 이제건(伊帝建)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제건이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낳게 될 것이다.’라 하고 자기 딸 덕주(德周)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마침내 〈보육은〉 거사(居士)가 되어 마하갑에 나무를 엮어 암자를 지었다.

有新羅術士見之曰, ‘居此, 必大唐天子來作壻矣.’ 後生二女, 季曰辰義, 美而多才智. 年甫笄, 其姊夢登五冠山頂而旋, 流溢天下. 覺與辰義說, 辰義曰, ‘請以綾裙買之.’ 姊許之. 辰義令更說夢, 攬而懷之者三, 旣而身動若有得, 心頗自負.

어떤 신라의 술사(術士)가 그것을 보고 ‘이 곳에서 살고 있으면 반드시 대당(大唐)의 천자가 와서 사위가 되리라.’라고 예언하였다. 뒤에 두 딸을 낳았는데 막내딸의 이름은 진의(辰義)로 아름답고 지혜와 재주가 많았다. 나이 겨우 15세[笄] 때 그의 언니가 꿈에 오관산(五冠山) 꼭대기에 올라가, 소변을 보니 천하에 흘러넘쳤다. 꿈에서 깨어나 진의에게 이야기하자 진의가 말하기를, ‘비단치마로 꿈을 사고 싶어요.’라고 하니 언니가 허락하였다. 진의가 언니에게 다시 꿈을 이야기하도록 하고 잡아서 품는 시늉을 세 번 하니 이윽고 몸에서 움직거리는 것이 무엇을 얻은 것 같았으며 마음이 자못 뿌듯하였다.

唐肅宗皇帝潛邸時, 欲遍遊山川, 以明皇天寶十二載癸巳春, 涉海到浿江西浦. 方潮退, 江渚泥淖, 從官取舟中錢, 布之, 乃登岸. 後名其浦爲錢浦.【閔漬編年綱目, 引碧巖等禪錄云, “宣宗年十三, 當穆宗朝, 戱登御床, 作揖群臣勢, 穆宗武宗心忌. 及武宗卽位, 宣宗遇害於宮中, 絶而後蘇, 潛出遠遁, 周遊天下, 備嘗險阻. 塩官安禪師黙識龍顔, 待遇特厚, 留塩官最久. 又宣宗嘗爲光王楊州屬郡, 塩官杭州屬縣, 皆接東海, 爲商船往來之地方. 當懼禍, 猶恐藏之不深, 故以遊覽山水爲名, 隨商船渡海. 時唐史未撰, 於唐室之事, 無由得詳. 但聞肅宗宣皇帝時, 有祿山之亂, 未聞宣宗遭亂出奔之事, 誤以宣宗皇帝, 爲肅宗宣皇帝云.” 又世傳, “忠宣王在元, 有翰林學士從王遊者. 謂王曰, ‘嘗聞王之先出於唐肅宗, 何所據耶? 肅宗自幼未嘗出閤, 祿山之亂, 卽位靈武, 何時東遊, 至有子乎?’ 王大慚不能對, 閔漬從旁對曰, ‘此我國史誤書耳. 非肅宗, 乃宣宗也.’ 學士曰, ‘若宣宗, 久勞于外, 庶或然也.’"】
遂至松嶽郡, 登鵠嶺南望曰, ‘此地必成都邑.’ 從者曰, ‘此八眞仙住處也.’ 抵摩訶岬養子洞, 寄宿寶育第, 見兩女悅之, 請縫衣綻. 寶育認是中華貴人, 心謂, '果符術士言.' 卽令長女應命. 纔踰閾, 鼻衄而出, 代以辰義, 遂薦枕. 留期月【閔漬編年, 或云一年.】 覺有娠, 臨別云, ‘我是大唐貴姓.’ 與弓矢曰, ‘生男則與之.’ 果生男曰作帝建. 後追尊寶育國祖元德大王, 其女辰義貞和王后.

당 숙종(肅宗) 황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자 하여 명황(明皇, 당 현종) 천보(天寶) 12년 계사년(753) 봄에 바다를 건너 패강(浿江)의 서쪽 나루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썰물이 되어 강가 개펄에 따라온 신하들이 배 안에서 돈을 꺼내어 뿌리고 이에 언덕으로 올라갔다. 뒤에 그 나루터의 이름을 전포(錢浦)라 하였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 『벽암록(碧巖錄)』 등의 선록(禪錄)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당 선종(宣宗)의 나이 13세 때 목종(穆宗)이 황제였었는데, 그가 장난삼아 황제의 자리에 올라가 신하들에게 읍(揖)하는 시늉을 하니 목종의 아들인 무종(武宗)이 내심 꺼렸다. 무종이 즉위한 후 선종이 궁중에서 해를 입고 숨이 끊어지려다 살아나,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멀리 달아나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며 온갖 풍상을 다 맛보았다. 염관현(鹽官縣)의 안선사(安禪師)가 용안(龍顔)을 속으로 알아보고 대우하는 것이 특히 후해 염관현에 가장 오래 머물렀다. 또 선종은 일찍이 광왕(光王)이 되었는데 광군(光郡)은 곧 양주(楊州)의 속군(屬郡)이고 염관현은 항주(杭州)의 속현(屬縣)인데 모두 황해[東海]에 연접하여 상선이 오가는 지방이었다. 〈선종은〉 화를 당할까 두렵고 완전히 몸을 숨기지 못한 것을 걱정한 까닭에 산수를 유람한다는 핑계로 상선을 따라 바다를 건넜다. 이때는 당의 역사가 찬술되지 않아서 당 황실의 일을 자세하게 알 수 없었다. 다만 숙종 선황제(肅宗 宣皇帝)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있었음은 들었으나 선종이 난리를 만나 달아났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으니 〈앞의 기록에서는〉 선종 황제를 숙종 선황제라 잘못 적은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세상에 전하기를, “충선왕(忠宣王)이 원(元)에 있을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왕과 교유하였던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일러 말하기를, ‘일찍이 듣기를 왕의 선조께서 당 숙종에게서 나왔다고 하던데 어디에 근거한 바입니까? 숙종은 어려서부터 일찍이 대궐 문을 나오지 않았고 안록산의 난 때 영무(靈武)에서 즉위하였으니 어느 때에 동쪽으로 와서 아들을 두기에 이르렀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답하지 못하였는데 민지가 곁에 있으면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잘못 쓰였을 뿐입니다. 숙종이 아니고 선종입니다.’라고 하였다. 학사가 말하기를 ‘선종이라면 오랫동안 외지에서 고생하였으니 아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드디어 송악군(松嶽郡)에 이르러 곡령(鵠嶺)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고, ‘이 땅은 반드시 도읍이 될 것이다.’라고 하자, 따르던 자가 말하기를, ‘이곳이 팔진선(八眞仙)이 사는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마하갑(摩訶岬)의 양자동(養子洞)에 이르러 보육(寶育)의 집에 묵었는데 〈숙종이〉 두 딸을 보고 기뻐하며 옷이 터진 것을 꿰매 달라고 요청하였다. 보육은 그가 중화(中華)의 귀인임을 알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과연 술사(術士)의 말에 들어맞는구나.’라고 하고 곧 큰 딸을 시켜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겨우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에서 피가 쏟아지는 바람에 진의(辰義)로 대신하였고, 결국 〈진의가〉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숙종이〉 한 달을 머무르다가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혹 1년이라고 하였다.】 임신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헤어지면서 말하길, ‘나는 대당(大唐)의 귀한 가문 사람[貴姓]이오.’라 하고 활과 화살을 주며 말하길, ‘아들을 낳거든 이것을 주시오.’라고 하였다. 과연 아들을 낳아 작제건(作帝建)이라 불렀다. 뒤에 보육을 추존하여 국조 원덕대왕(國祖 元德大王)이라 하고 그의 딸 진의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였다.

作帝建幼而聰睿神勇. 年五六, 問母曰, ‘我父誰?’ 曰 ‘唐父.’ 盖未知其名故耳. 及長, 才兼六藝, 書射尤絶妙. 年十六, 母與以父所遺弓矢, 作帝建大悅, 射之百發百中, 世謂神弓. 於是, 欲覲父, 寄商船, 行至海中, 雲霧晦暝, 舟不行三日. 舟中人卜曰, ‘宜去高麗人.’【閔漬編年或云, ‘新羅金良貞, 奉使入唐, 因寄其船, 良貞夢, 白頭翁曰, 「留高麗人, 可得順風.」’】 作帝建執弓矢, 自投海. 下有巖石, 立其上, 霧開風利, 船去如飛.
俄有一老翁拜曰, ‘我是西海龍王. 每日晡, 有老狐作熾盛光如來像, 從空而下, 羅列日月星辰於雲霧閒, 吹螺擊鼓, 奏樂而來, 坐此巖, 讀臃腫經, 則我頭痛甚. 聞郞君善射, 願除吾害.’ 作帝建許諾.【閔漬編年, 或云 ‘作帝建於巖邊, 見有一徑, 從其徑, 行一里許, 又有一巖, 巖上復有一殿. 門戶洞開, 中有金字寫經處, 就視之, 筆點猶濕. 四顧無人, 作帝建就其坐, 操筆寫經, 有女忽來前立. 作帝建謂是觀音現身, 驚起下坐, 方將拜禮, 忽不見. 還就坐, 寫經良久, 其女復見而言, 「我是龍女, 累載寫經, 今猶未就. 幸郞君善寫, 又能善射, 欲留君, 助吾功德, 又欲除吾家難. 其難則待七日, 可知.」’】
及期, 聞空中樂聲, 果有從西北來者. 作帝建疑是眞佛, 不敢射, 翁復來曰, ‘正是老狐, 願勿復疑.’ 作帝建撫弓撚箭, 候而射之, 應弦而墜, 果老狐也.

작제건(作帝建)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력이 신(神)과 같았다. 나이 대여섯 살에 어머니에게 묻기를, ‘나의 아버지는 누구신가요?’라고 하였는데 답하기를 ‘중국 사람[唐父]이다.’라고만 하였으니, 이는 이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육예(六藝)에 두루 뛰어났는데 글씨와 활쏘기가 더욱 빼어났다. 나이 16세 때 어머니가 〈그에게〉 아버지가 남기고 간 활과 화살을 주자 작제건이 크게 기뻐하였는데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이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신궁(神弓)이라 불렀다. 이에 아버지를 뵙고자 하여 상선(商船)에 의탁하여 가다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니 구름과 안개로 사방이 어둑해져서 배가 3일 동안이나 나아가지 못하였다. 배 안에서 사람들이 점을 쳐보고 말하기를, ‘마땅히 고려(高麗) 사람이 없어져야 한다.’라고 하여【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 혹 말하기를, “신라(新羅)의 김양정(金良貞)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당(唐)에 들어갈 때 이로 인하여 〈작제건이〉 그 배를 빌려 탔는데, 김양정의 꿈에 흰 머리의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고려 사람을 남겨놓고 가면 순풍을 얻으리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작제건이 활과 화살을 쥐고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졌는데, 아래에 바윗돌이 있어 그 위에 서니 안개가 개이고 바람이 빨라 배가 나는 듯이 나아갔다.
잠시 후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절을 하며 말하기를, ‘나는 서해(西海)의 용왕(龍王)이오. 늘 해질녘이 되면 어떤 늙은 여우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의 모습이 되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구름과 안개 사이에 해 ‧ 달 ‧ 별들을 벌여놓고는 나각(螺角)를 불고 북을 치며 음악을 연주하며 와서는 이 바위에 앉아 『옹종경(臃腫經)』을 읽어대니 내 머리가 매우 아프오. 듣건대 그대는 활을 잘 쏜다고 하니 나의 괴로움을 없애주기 바라오.’라고 하니 작제건이 허락하였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서는 혹 말하기를, “작제건이 바위 근처에서 한 갈래 길을 보고 그 길을 따라 1리 남짓을 가니 또 한 개의 바위가 있는데 바위 위에 다시 한 채의 전각이 있었다. 문이 활짝 열렸고 안에 금자(金字)로 사경(寫經)하는 곳이 있어 나아가서 보니 붓으로 쓴 점획(點劃)이 아직도 촉촉하였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는지라 작제건이 그 자리에 앉아 붓을 잡고 불경을 베끼노라니 어떤 여인이 홀연히 와서 앞에 섰다. 작제건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현신이라 여기고 놀라 일어나 자리에서 내려와 바야흐로 절하려 하였으나 〈여인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다시 자리에 앉아 불경을 오랫동안 베끼고 있으려니 그 여인이 다시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용녀(龍女)로서 여러 해 동안 불경(佛經)을 베꼈으나 아직도 다 쓰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그대는 글씨도 잘 쓰시고 또 활도 잘 쏘시니 그대가 머물면서 제 공덕(功德) 닦는 일을 도와주셨으면 하고 또 우리 집안의 어려움을 없애 주셨으면 합니다. 그 어려움은 7일을 기다리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때가 되자 공중에서 풍악 소리가 들리더니 과연 서북쪽에서 오는 자가 있었다. 작제건이 진짜 부처가 아닌가 의심하여 감히 활을 쏘지 못하자 노인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 ‘바로 그 늙은 여우이니 바라건대 다시는 의심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활을 잡고 화살을 잡아두었다가 맞추어 쏘니 활시위만 당기면 떨어지는데 과연 늙은 여우였다. 

翁大喜, 迎入宮, 謝曰, ‘賴郞君, 吾患已除, 欲報大德. 將西入唐, 覲天子父乎? 富有七寶, 東還奉母乎?’ 曰, ‘吾所欲者, 王東土也.’ 翁曰, ‘王東土, 待君之子孫三建必矣. 其他惟命.’ 作帝建聞其言, 知時命未至, 猶豫未及答, 坐後有一老嫗戱曰, ‘何不娶其女而去?’ 作帝建乃悟請之, 翁以長女翥旻義妻之,
作帝建賫七寶將還, 龍女曰, ‘父有楊杖與豚勝七寶, 盍請之?’ 作帝建請還七寶, 願得楊杖與豚, 翁曰, ‘此二物, 吾之神通, 然君有請, 敢不從?’ 乃加與豚. 於是, 乘漆船, 載七寶與豚, 泛海焂到岸, 卽昌陵窟前江岸也. 白州正朝劉相晞等聞曰, ‘作帝建西海龍女來, 實大慶也.’ 率···四州, 江華·喬桐·河陰三縣人, 爲築永安城, 營宮室.
龍女初來, 卽往開州東北山麓, 以銀盂掘地, 取水用之, 今開城大井是也. 居一年, 豚不入牢, 乃語豚曰, ‘若此地不可居, 吾將隨汝所之.’ 詰朝, 豚至松嶽南麓而臥, 遂營新第, 卽康忠舊居也. 往來永安城, 而居者三十餘年.

노인이 크게 기뻐하며 그를 궁궐로 맞아들여 사례하며 말하기를, ‘그대에 힘입어 나의 근심이 이미 사라졌으니 그 큰 은덕을 갚고 싶소. 장차 서쪽으로 당(唐)에 들어가 천자이신 아버님을 뵙겠소? 〈아니면〉 부자가 되는 칠보(七寶)를 가지고 동쪽으로 돌아가 모친을 받들려오?’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말하기를, ‘제가 바라는 바는 동쪽 땅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노인은, ‘동쪽 땅에서 왕이 되는 것은 그대의 자손 3건(三建)의 때를 반드시 기다려야만 하오. 그 밖의 것은 명만 하시오.’라고 하였다. 작제건(作帝建)이 그 말을 듣고 시명(時命)이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머뭇거리며 답하지 못하자 〈그의〉 자리 뒤에 있던 한 노파가 놀리며 말하길, ‘어찌 그 딸에게 장가들지 않고 떠나려 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곧 알아차리고 그것을 청하니, 노인은 맏딸 저민의(翥旻義)를 아내로 삼게 해주었다.
작제건이 칠보를 가지고 장차 돌아가려 하자 용녀(龍女)가 말하기를, ‘아버지에게 있는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는 칠보보다 나은 것이니, 어찌 요청하지 않으시는지요?’라고 하였다. 작제건이 칠보를 돌려주며 청하기를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를 얻기를 바란다고 하니, 노인은 ‘그 두 가지는 내가 가진 신통(神通)이오만 그러나 그대가 요청함이 있으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면서 〈칠보에〉 돼지를 더해 주었다. 이에 〈작제건이〉 옻칠한 배에 올라 칠보와 돼지를 싣고 바다를 건너 순식간에 바닷가에 닿아보니 곧 창릉굴(昌陵窟) 앞의 강가였다. 배주정조(白州正朝) 유상희(劉相晞) 등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작제건이 서해의 용녀에게 장가들고 오니 참으로 큰 경사입니다.’라고 하면서, 개주(開州)·정주(貞州)·염주(鹽州)·배주 4주와 강화현(江華縣)·교동현(喬桐縣)·하음현(河陰縣) 3현의 백성들을 거느리고 와 〈그를〉 위해 영안성(永安城)을 쌓고 궁실을 지어주었다.
용녀가 처음 오자 바로 개주(開州)의 동북쪽 산기슭에 가서 은그릇으로 땅을 파고 물을 길어 썼는데 지금 개성(開城)의 대정(大井)이 그곳이다. 〈거기서〉 1년을 살았는데도 돼지가 우리에 들어가지 않자 이에 돼지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 땅이 살 만하지 않다면 나는 장차 네가 가는 바를 따르겠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돼지가 송악(松嶽) 남쪽 기슭에 이르러 드러누우므로 드디어 새 집을 지으니 곧 강충(康忠)의 옛집이었다. 〈작제건이〉 영안성을 오가며 산 것이 30여년이었다.

龍女嘗於松嶽新第寢室窓外鑿井, 從井中, 往還西海龍宮, 卽廣明寺東上房北井也. 常與作帝建約曰, ‘吾返龍宮時, 愼勿見. 否則不復來.’ 一日, 作帝建密伺之, 龍女與少女入井, 俱化爲黃龍, 興五色雲. 異之, 不敢言. 龍女還怒曰, ‘夫婦之道, 守信爲貴, 今旣背約, 我不能居此.’ 遂與少女, 復化龍入井, 不復還. 作帝建晩居俗離山長岬寺, 常讀釋典而卒. 後追尊爲懿祖景康大王龍女元昌王后.

용녀(龍女)는 일찍이 송악(松嶽)의 새 집 침실의 창 밖에 우물을 파고 우물 속으로부터 서해(西海)의 용궁(龍宮)을 오갔는데 바로 광명사(廣明寺)의 동상방(東上房) 북쪽 우물이다. 늘 〈용녀는〉 작제건(作帝建)과 더불어 다짐하기를, ‘제가 용궁으로 돌아갈 때 삼가 엿보지 마십시오. 어긴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작제건이 몰래 엿보았더니 용녀는 어린 딸과 더불어 우물에 들어가 함께 황룡(黃龍)으로 변해 오색구름을 일으켰다. 〈작제건이〉 기이하게 여겼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용녀가 돌아와 화를 내며 말하기를, ‘부부의 도리는 신의를 지킴을 귀하게 여기는데 이제 이미 다짐을 저버렸으니 저는 여기에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드디어 어린 딸과 더불어 다시 용으로 변해 우물에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작제건은 만년에 속리산(俗離山)의 장갑사(長岬寺)에 살며 늘 불교 경전을 읽다가 죽었다. 후에 추존하여 의조 경강대왕(懿祖 景康大王)이라 하고 용녀를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하였다.

元昌生四男, 長曰龍建, 後改, 字文明, 是爲世祖. 貌魁偉美鬚髥, 器度宏大, 有幷呑三韓之志. 嘗夢見一美人, 約爲室家. 後自松嶽, 往永安城, 道遇一女惟肖, 遂與爲婚. 不知所從來, 故世號夢夫人. 或云, ‘以其爲三韓之母, 遂姓韓氏.’ 是爲威肅王后世祖松嶽舊第, 有年又欲創新第於其南, 卽延慶宮奉元殿基也.
桐裏山祖師道詵入唐, 得一行地理法而還. 登白頭山, 至鵠嶺, 見世祖新構第曰, ‘種穄之地, 何種麻耶?’ 言訖而去. 夫人聞而以告, 世祖倒屣追之, 及見, 如舊識. 遂與登鵠嶺, 究山水之脉, 上觀天文, 下察時數曰, ‘此地脉, 自壬方白頭山水母木幹來, 落馬頭明堂. 君又水命, 宜從水之大數, 作宇六六, 爲三十六區, 則符應天地之大數, 明年必生聖子, 宜名曰王建.’ 因作實封, 題其外云, ‘謹奉書, 百拜獻書于未來統合三韓之主大原君子足下.’
唐僖宗乾符三年四月也. 世祖從其言, 築室以居, 是月, 威肅有娠, 生太祖.【閔潰編年, ‘太祖年十七, 道詵復至請見曰, 「足下應百六之運, 生於天府名墟, 三季蒼生, 待君弘濟.」 因告以出師置陣, 地利天時之法, 望秩山川, 感通保佑之理. 乾寧四年五月, 世祖薨于金城郡, 葬永安城江邊石窟, 號曰昌陵, 以威肅王后合葬.’ 實錄, ‘顯宗十八年, 加上世祖謚曰元烈, 后曰惠思高宗四十年, 加世祖敏惠, 后曰仁平.’】”

원창왕후(元昌王后)는 아들 넷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부르길 용건(龍建)이라 하였다가 뒤에 융(隆)으로 고쳤으며 자(字)는 문명(文明)이니 이 사람이 세조(世祖)이다. 체격이 우뚝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도량이 넓고 커서 삼한(三韓)을 아울러 삼키려는 뜻이 있었다. 일찍이 꿈에서 한 미인을 보고 부인[室家]으로 삼겠다고 다짐하였다. 뒤에 송악(松嶽)에서 영안성(永安城)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용모가 매우 닮아 드디어 〈그녀와〉 더불어 혼인하였다.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런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몽부인(夢夫人)이라 불렀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그녀가 삼한의 어머니가 되셨기에 드디어 성을 한씨(韓氏)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위숙왕후(威肅王后)이다. 세조가 송악의 옛집에서 살다가 몇 년 후 또 그 남쪽에다 새 집을 지으려 하니 곧 연경궁(延慶宮)의 봉원전(奉元殿) 터이다.
그 때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唐)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얻고 돌아왔다. 백두산(白頭山)에 올랐다가 곡령(鵠嶺)에 이르러 세조가 새로 지은 집을 보고 말하기를, ‘기장[穄]을 심을 땅에다 어찌하여 마(麻)를 심었는가?’라 하고 말을 마치자 가버렸다.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알리자 세조가 급히 쫓아갔는데, 만나보니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 같았다. 드디어 함께 곡령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펴보고 위로 천문을 바라보며 아래로 운수를 자세히 살펴보고서 말하기를, ‘이 지맥은 임방(壬方)의 백두산에서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까지 떨어지고 있소. 그대는 또한 수명(水命)이니 마땅히 수(水)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구(區)로 만들면 천지의 대수와 맞아 떨어져 내년에는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마땅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지으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봉투를 만들어 그 겉에 기록하기를, ‘백 번 절하고 미래에 삼한을 통합할 임금이신 대원군자(大原君子) 족하(足下)께 삼가 글월을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그 때가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3년(876) 4월이었다. 세조가 그의 말을 따라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 달 위숙왕후(威肅王后)가 임신하여 태조(太祖)를 낳았다.”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에는, “태조의 나이 17세 때 도선(道詵)이 다시 와서 뵙기를 요청하고 말하기를, ‘족하(足下)께서는 백육(百六)의 운에 응하여 천부(天府)의 명허(名墟)에서 탄생하셨으니 3계(三季)의 창생이 그대의 홍제(弘濟)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쟁에 나가 진을 칠 때 유리한 지형과 적합한 때를 고르는 법, 그리고 산천을 차례대로 제사지내어 신과 통하고 도움을 받는 이치를 알려주었다. 건녕(乾寧) 4년(897) 5월에 세조께서 금성군(金城郡)에서 돌아가시니 영안성(永安城) 강변의 석굴에다 장사하고 이름을 창릉(昌陵)이라 하였으며 위숙왕후를 합장하였다.”라 하였다. 『실록(實錄)』에는, “현종(顯宗) 18년(1027)에 세조의 시호에 원렬(元烈)을, 왕후에게는 혜사(惠思)를 더하여 올렸으며, 고종(高宗) 40년(1253)에는 세조에게 민혜(敏惠)를, 왕후에게는 인평(仁平)을 더하였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李齊賢曰, “金寬毅云, ‘聖骨將軍虎景, 生阿干康忠康忠生居士寶育, 是爲國祖元德大王寶育生女, 配唐貴姓而生懿祖懿祖世祖世祖太祖.’ 如其所言, 唐貴姓者, 於懿祖爲皇考, 而寶育皇考之舅也. 而稱爲國祖, 何也?”
又言, “太祖追尊三代祖考及其后妃, 考爲世祖威武大王, 母爲威肅王后, 祖爲懿祖景康大王, 祖母爲元昌王后, 曾祖母爲貞和王后, 曾祖母之父寶育, 爲國祖元德大王云. 略曾祖而書曾祖母之父, 謂之三代祖考, 何也? 按王代宗族記云, ‘國祖, 太祖之曾祖也, 貞和, 國祖之妃也.’ 聖源錄云, ‘寶育聖人者, 元德大王之外祖也.’ 以此觀之, 元德大王是唐貴姓者之子, 而於懿祖爲考也, 貞和王后寶育之外孫婦, 而於懿祖爲妣也. 其以寶育國祖元德大王者, 誤矣.”
又曰, “金寬毅云, ‘懿祖得唐父所留弓矢, 涉海而遠覲.’ 然則其志深切矣, 龍王問其所欲, 卽求東歸. 恐懿祖不如是也. 聖源錄云, ‘昕康大王【卽懿祖】之妻龍女者, 平州豆恩坫角干之女子也.’ 則與寬毅所記者, 異矣.
又曰, “金寬毅云, ‘道詵世祖松嶽南第曰, 「種穄之田而種麻也.」 穄之與王, 方言相類. 故太祖因姓王氏.’ 父在而子改其姓, 天下豈有是理乎? 嗚呼! 其謂我太祖爲之乎? 且太祖世祖, 仕弓裔之多疑忌, 太祖無故, 獨以王爲姓, 豈非取禍之道乎? 謹按王氏宗族記, 國祖姓王氏. 然則非至太祖, 始姓王也, 種穄之說, 不亦誣哉? 又云, ‘懿祖·世祖諱下字, 與太祖諱並同.’ 金寬毅以開國之前, 俗尙淳朴, 意其或然, 故書之. 王代曆, 懿祖通六藝, 書與射, 妙絶一時, 世祖少蘊器局, 有雄據三韓之志. 豈不知祖考之名爲不可犯, 而自以爲名, 且以名其子乎? 况太祖創業垂統, 動法先王, 寧有不得已, 而恬於非禮之名乎? 竊謂新羅之時, 其君稱麻立干, 其臣稱阿干·大阿干, 至於鄕里之民, 例以干, 連其名而呼之, 盖相尊之辭也. 阿干或作阿粲閼餐, 以干粲餐三字, 其聲相近也. 懿祖·世祖諱下字, 亦與干粲餐之聲爲相近, 乃所謂相尊之辭, 連其名而呼之者之轉也, 非其名也. 太祖適以此字爲名, 好事者遂附會, 而爲之說曰, ‘三世一名, 必王三韓.’ 盖不足信也.”
論曰, “載稽舊籍, 同知樞密兵部尙書金永夫徵仕郞檢校軍器監金寬毅, 皆毅宗朝臣也. 寬毅編年通錄永夫採而進之, 其剳子亦曰, ‘寬毅訪集諸家私蓄文書.’ 其後, 閔漬編年綱目, 亦因寬毅之說. 獨李齊賢援據宗族記·聖源錄, 斥其傳訛之謬, 齊賢一代名儒, 豈無所見, 而輕有議於時君世系乎? 其云肅宗·宣宗者, 以唐書考之, 則肅宗自幼, 未嘗出閤, 果如元學士之言矣. 宣宗雖封光王唐史無藩王就封之制. 而其遭亂避禍之說, 亦是禪錄.雜記二說皆無所據, 不足信也. 况龍女之事, 何其荒恠, 若是之甚邪? 太祖實錄, 乃政堂文學修國史黃周亮所撰也. 周亮太祖顯宗之朝, 太祖時事, 耳目所及, 其於追贈, 據實書之. 以貞和爲國祖之配, 以爲三代, 而略無一語及於世傳之說. 寬毅毅宗時微官, 且去太祖二百六十餘年, 豈可舍當時實錄, 而信後代無稽雜出之書耶? 竊觀北史拓拔氏以爲軒轅之後, 而神元皇帝天女所生, 則其荒誕甚矣. 且言, 慕容氏爲慕二儀之德, 繼三光之容, 宇文氏爲出自炎帝, 得皇帝玉璽, 而其俗謂天子曰宇文, 故因以爲氏. 先儒議之曰, ‘其臣子從而爲之辭, 以緣飾耳.’ 嗚呼! 自古論人君世系者, 類多恠異, 而其間或有附會之說, 則後之人, 不能不致疑焉. 今以實錄所載追贈三代爲正, 而寬毅等說, 亦世傳之久, 故幷附云.”
高麗世系終

이제현(李齊賢)이 찬술하기를, “김관의(金寬毅)가 쓰기를,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이 아간(阿干) 강충(康忠)을 낳고 강충이 거사(居士) 보육(寶育)을 낳으니 이 분이 국조 원덕대왕(國祖 元德大王)이다. 보육이 딸을 낳으니 당(唐)의 귀한 가문 사람[貴姓]의 배필이 되어 의조(懿祖)를 낳고 의조가 세조(世祖)를 낳고 세조가 태조(太祖)를 낳았다.’고 하였다. 그가 말한 대로라면 당나라의 귀인이라고 한 이는 의조에게는 황고(皇考)가 되고 보육은 황고의 장인이 된다. 그런데도 국조(國祖)라고 일컫는 것은 어째서인가?”라 하였다.
〈이제현이〉 또 말하기를, “〈김관의는〉 ‘태조(太祖)가 삼대(三代)의 조상과 그 후비(后妃)를 추존(追尊)하여 아버지를 세조 위무대왕(世祖 威武大王)이라 하고 어머니를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였으며, 할아버지를 의조 경강대왕(懿祖 景康大王)이라 하고 할머니를 원창왕후(元昌王后)라 하였으며, 증조할머니를 정화왕후(貞和王后)라 하고 증조할머니의 아버지 보육(寶育)을 국조 원덕대왕(國祖 元德大王)이라 하였다.’고 말한다. 증조를 빠트린 대신 증조할머니의 아버지를 써넣어 삼대 조고(祖考)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왕대종족기(王代宗族記)』를 살펴보건대, ‘국조는 태조의 증조이고 정화왕후는 국조의 비이다.’라고 하였으며, 『성원록(聖源錄)』에 이르기를, ‘보육성인(寶育聖人)은 원덕대왕의 외할아버지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서 보건대 원덕대왕은 당의 귀한 가문 사람[貴姓]의 아들로서 의조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정화왕후는 보육의 외손부(外孫婦)로서 의조에게는 비가 된다. 그러니 보육을 국조 원덕대왕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라 하였다.
〈이제현이〉 또 말하기를, “김관의는 말하기를, ‘의조가 중국인 아버지[唐父]가 남기고 간 활과 화살을 받은 바, 바다를 건너 멀리 가서 〈아버지를〉 뵈려 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곧 그 뜻이 매우 절실하였을 텐데도 용왕(龍王)이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묻자 곧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구하였다고 하였다. 의조는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성원록(姓源錄)』에 이르기를, ‘흔강대왕(昕康大王)【곧 의조】의 처인 용녀(龍女)는 평주(平州) 사람인 두은점(豆恩坫) 각간(角干)의 딸이다.’고 하였으니 곧 김관의가 기록한 바의 것과는 다르다.”라 하였다.
〈이제현이〉 또 말하기를, “김관의는 말하기를, ‘도선(道詵)이 세조(世祖)의 송악(松嶽) 남쪽에 있는 집을 보고 말하기를, 「기장을 심을 밭에 마를 심었구나.」라고 하였는데 기장은 왕(王)과 우리말에서 서로 비슷하다. 그런 까닭에 태조께서는 이로 인해 왕씨(王氏)를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 아들이 그 성을 고쳤다면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아! 우리 태조께서 이것을 하였다고 여기는가? 또 태조와 세조께서는 궁예(弓裔) 밑에서 벼슬하였다. 궁예는 의심과 시기가 많았는데 태조께서 아무 까닭 없이 홀로 왕씨를 성으로 삼았다면 어찌 화를 얻는 길이 아니었으랴? 삼가 『왕씨종족기(王氏宗族記)』를 살펴보니 국조(國祖)의 성이 왕씨라 하였다. 그렇다면 곧 태조에 이르러 비로소 왕을 성으로 삼은 것이 아니니 기장을 심는다는 이야기도 또한 거짓이 아니리오? 〈김관의는〉 또 말하기를, ‘의조와 세조 휘(諱)의 아래 글자가 태조의 휘와 더불어 나란히 같다.’고 하였다. 김관의는 개국하기 전에는 풍속이 순박함을 숭상하여 혹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까닭에 썼을 것이다. 〈그러나〉 『왕대력(王代曆)』에는, 의조께서 육예(六藝)에 통달하였고 글씨와 활쏘기가 당대에 신묘하게 빼어났으며, 세조께서는 젊은 시절 재주와 도량을 쌓아 삼한(三韓)에 웅거(雄據)할 뜻을 지녔다고 하였다. 어찌 할아버지의 이름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이름으로 삼으며 또 아들의 이름으로까지 삼았겠는가? 하물며 태조께서는 창업하여 왕통을 전함에 있어, 행동거지를 선왕(先王)을 본받았는데 어찌 부득이하게 편안히 예(禮)에 어긋난 이름을 지었겠는가? 삼가 신라(新羅) 때를 생각하건대, 그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 부르고 그 신하를 아간(阿干)·대아간(大阿干)이라 불렀으며 시골 백성들에 이르러서도 으레 간(干)을 이름에 붙여 불렀으니 대개 서로 높이는 말이다. 아간을 혹 아찬(阿粲)·알찬(閼餐)이라고 한 것도 간·찬(粲)·찬(餐) 3자(字)의 소리와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의조와 세조 휘의 아래 글자도 또한 간·찬(粲)·찬(餐)의 소리와 더불어 서로 가까우니 이는 이른바 서로 높이는 말을 그 이름에 이어 붙여 부른 것이 바뀐 것이지 이름은 아니다. 태조께서 마침 이 글자를 이름으로 삼았기에 호사가(好事家)들이 드디어 끌어 붙여다가 만들어 말하기를, ‘삼대(三代)가 같은 이름이면 반드시 삼한의 왕이 된다.’ 하였을 터이니 대개 믿을 수 없다.”라 하였다.
논하여 말하기를, “옛 책을 상고해 보니 동지추밀 병부상서(同知樞密 兵部尙書) 김영부(金永夫)와 징사랑 검교군기감(徵仕郞 檢校軍器監) 김관의는 모두 의종(毅宗) 때의 신하이다. 김관의가 『편년통록(編年通錄)』을 짓고 김영부가 가려 뽑아 바쳤는데 그 차자(箚子)에서 또한 말하기를, ‘김관의가 여러 사람들이 사사로이 모아둔 문서들을 찾아 모았나이다.’고 하였다. 그 후, 민지(閔漬)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편찬하면서 또한 김관의의 설에 근거하였다. 홀로 이제현만이 『종족기(宗族記)』와 『성원록』을 근거로 잘못 전해진 것을 배척하였으니, 이제현은 당대의 명유(名儒)로, 어찌 본 바도 없이 가볍게 당시 임금의 세계(世系)를 의논하였겠는가? 그 숙종(肅宗)이니 선종(宣宗)이니 말한 것은,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건대 숙종은 어려서부터 일찍이 궁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었으니 과연 원(元) 학사(學士)의 말과 같다. 〈그리고〉 선종이 비록 광왕(光王)에 봉해졌다고 하지만, 당사(唐史)에는 번왕(藩王)을 봉지(封地)로 보내는 제도가 없고, 또 그가 난리를 만나 화를 피하였다는 이야기는, 역시 선록(禪錄)과 잡기(雜記) 두 설이 모두 근거가 없으니 믿을 수가 없다. 하물며 용녀의 일은 어찌 그 허황되고 괴이한 것이 이와 같이 심할 수 있겠는가? 『태조실록(太祖實錄)』은 바로 정당문학 수국사(政堂文學 修國史) 황주량(黃周亮)이 편찬한 바이다. 황주량은 태조의 손자인 현종(顯宗) 때 벼슬하였으므로 태조 때의 일을 직접 듣고 본 것이 있었으니 그 〈삼대(三代)를〉 추증한 것에 대해서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것을 썼을 것이다. 정화왕후를 국조의 배필이라 하고 삼대로 삼았으나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설에 대해서는 생략하여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김관의는 의종 때의 하급 관리이며 또 태조와 260여년 떨어져 있으니, 어찌 당시의 실록을 버려두고서 후대에 근거함이 없이 마구 뽑은 책을 믿으랴? 삼가 『북사(北史)』를 살펴보건대, 탁발씨(拓拔氏)는 헌원(軒轅)의 후손이요, 신원황제(神元皇帝)는 천녀(天女)의 소생이라 하였으니 그 황탄(荒誕)함이 심하다. 또한, 모용씨(慕容氏)는 이의(二儀)의 덕을 사모하고 삼광(三光)의 용모를 계승하였다는 것에서 〈성씨를〉 삼았으며, 우문씨(宇文氏)는 염제(炎帝)로부터 나와 황제의 옥새를 얻었는데 그 풍속에 천자를 일러 우문(宇文)이라고 하므로 그런 까닭에 성씨로 삼았다고 하였다. 선유(先儒)들은 이를 두고 의논하기를, ‘그 신하들이 〈그들을〉 따르느라 꾸며낸 것일 뿐이다.’고 하였다. 아아! 예로부터 임금의 세계를 논한 것들은 괴이한 것이 많고 간혹 억지로 끌어다 붙인 이야기도 있어 뒷날의 사람들이 의심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실록』에 실린 바 삼대를 추증한 것을 정설로 삼고 김관의 등의 설도 또한 세상에 전해 내려온 지가 오래되어 그런 까닭에 아울러 붙여둔다.”라 하였다.
고려세계 끝.


반응형

'Who'sWho in Ancient Kore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달라왕(阿達羅王)  (0) 2019.11.04
아달라니사금(阿達羅尼師今)  (0) 2019.11.04
왕건(王建)  (0) 2019.07.22
탈해왕(脫解王)  (0) 2019.07.01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0) 2019.07.0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