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보기에 미라 연구에서 두 번의 중요한 사건을 들자면,
하나는 외치이며 다른 하나는 마왕퇴다.
마왕퇴는 중국에서 발견되고 순수히 중국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된 때문에 상대적으로 잘 안 알려지고 저평가되는 감이 있는데
필자가 동아시아의 학자로서 보다 많은 이런 정보를 종합하고 이해하여 결론 내려 본다면
외치와 마왕퇴, 이 두 연구는 미라 연구사에서 막상막하의 업적을 남겼다.
이 두 사례 모두 연대가 오래된 것으로 역사학적 연구로만으로 공백이 되기 쉬운 많은 실증자료를 안겼고
특히 그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의학적 정보를 제공한 측면,
그리고 당시 사회에 대한 역사학적 이해를 풍부하게 했다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만 외치의 경우 마왕퇴보다 한걸음 더 나간 것이 있다면
당시 떠오르기 시작한 고대 DNA연구 기법을 그 시대 최고 수준의 연구실들이 참여해서 작업했다는 것으로
이것이 외치가 마왕퇴를 아슬아슬 한 정도로 누르고 최고의 왕좌를 차지할 만한 기폭제가 되었다고 하겠다.
외치 연구는 아직 끝나지가 않았다.
잊어버릴 만하면 뭔가 새로운 정보가 지금도 나오고 있다.
이 연구는 향후 백 년은 더 갈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Editor's Note]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지점은 영향 관계다.
마왕퇴 한묘漢墓는 무령왕릉이 발굴된 그해 1971년 연말에 발견 발굴되기 시작해 1974년까지 종족 공동묘지 세 기가 조사를 완료했다.
그 공식 보고서는 80년대에 집대성되어 나오기 시작했으니 미라 조사 보고도 그에 당연히 포함된다.
외치 미라가 지금도 툭하면 새로운 조사성과라 해서 내는 것과 달리 마왕퇴 미라는 대규모 연구인력이 달라 붙어 한꺼번에 성과를 쏟아내고선 그 시신은 호남성박물원에 안치됐다.
시신은 완전히 해부하고 장기는 하나하나 발라내서 당시 할 수 있는 의학조사는 다했다.
지금 다시 시작한다면 DNA 조사가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혁혁한 성과를 냈다.
참외씨를 장에서 찾아내고선 이 귀부인 사망 시점을 참외가 익는 계절로 확정했고 관절염을 앓았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물론 그런 성과 중 상당 부문이 이 분야에서 연구를 선도한 구미쪽 경향을 흡수했겠지만
마왕퇴는 그런 것들을 집대성하고 또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이 마왕퇴 의학연구가 저 외치 연구에도 틀림없이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 텐데 그에 대한 언급들이 없다.
마왕퇴 미라는 장을 바꾸어 그 세계를 탐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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