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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환의 AllaboutEgypt]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 (10) 투탕카멘의 사인 - 국왕살해의 범인은 누구인가 (2)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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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3,300-year-old mummy of the ancient King Tutankhamun lies exposed on a CT machine in Luxor, Egypt on Wednesday as Egyptian antiquities chief Zahi Hawass, left, looks on.Saedi Press / AP



투탕카멘 Tutankhamun (재위 기원전 1336~1327) 사후 왕위에 오른 인물은 아이 Ay (재위 기원전 1327~1323)와 호렘헵 Horemheb (재위 기원전 1323-1295)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소년왕을 살해한 범인들일까요? 롱아일랜드 대학 Long Island University 선임연구원 밥 브라이어 Bob Brier (1943년-현재)는 투탕카멘을 시해한 범인으로 아이를 지목했습니다. 그러나 아이 역시 투탕카멘을 살해할 이유가 거의 없는 인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여러 정황 증거를 근거로 학자들은 아이를 아멘엠하트 4세/아켄아텐 Amenhotep IV/Akhenaten (재위 기원전 1352~1336) 어머니인 투야 Tuya 형제, 그리고 / 혹은 왕비 네테르타리 Nefertari와 호렘헵 아내 무트노즈메트 Mutnodjmet 아버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추론이 사실이라면 아이는 투탕카멘의 총리대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작은할아버지 그리고 / 혹은 외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투탕카멘 관을 살피는 하워드 카터



그렇다면 투탕카멘이 즉위할 무렵 이미 60세를 훌쩍 넘긴 연로한 파워 엘리트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에 왕위에 오르기 위해 무리하게 자기 손자인 소년왕을 살해하려 했을까요?

오히려 왕이 국정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공적·사적 실익이 더 크지 않았을까요?

아이에게는 나크트민 Nakhtmin 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아이의 재위기에는 나크트민이 아이 뒤를 이를 후계자로 지명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보면 아이가 투탕카멘을 살해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위 부자상속은 <오시리스 신화 Osirian Cycle>를 통해 신화적 정당성을 부여 받은 이집트의 오랜 전통이었으며 왕조 존속에 꼭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아이가 자신의 아들 나크트민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은 왕이 재위 중에 취해야 할 당연한 조치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투탕카멘 관을 개봉하는 하워드 카터



그러나 아이가 서거한 후 나크트민은 호렘헵과의 왕위경쟁에서 패하였고 그 결과 왕위는 제18 왕조 마지막 파라오가 될 호렘헵에게 돌아갔습니다.

여기까지의 정황으로 판단한다면 투탕카멘 사망으로 가장 큰 수혜를 누린 사람은 호렘헵처럼 보입니다.

군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왕족은 아니었던 호렘헵은 투탕카멘과 아이를 이어 신-왕 god-king 파라오가 되어 28년 간 이집트를 다스렸으며 투탕카멘이 시작한 다신교로의 회귀 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했습니다.

더불어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 치세에 건립된 건축물들과 조형예술 작품들을 헐어 버리거나 파괴하여 자신을 위한 새로운 건축물의 건축자재 혹은 카르낙 신전 탑문 충전재 등으로 사용했으며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과 투탕카멘까지의 왕 이름을 삭제하거나 이들 이름 위에 자기 이름을 덧씌워 새기게 했습니다.

그 결과,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과 투탕카멘이라는 이름은 신왕국시대 제19 왕조(기원전 1295~1286)를 비롯한 후대 공식 기록이나 왕명록 king list에서 완전히 삭제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대에 작성된 왕명표에서는 투탕카멘 할아버지인 아멘호텝 3세 Amenhotep III (재위 기원전 1390~1352) 다음에 바로 호렘헵이 등장합니다.

지금까지의 사건 전개를 보면 세 용의자 중 투탕카멘 시해를 주도한 인물은 호렘헵이 확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투탕카멘을 죽인 장본인은 호렘헵일까요?

투탕카멘 시대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드라마와 같은 대중문화에서 호렘헵이나 아이는 대개 권력욕이 강한 음모자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됩니다.

투탕카멘 머리 X선 투과



그러나 이 시대에 대한 역사는 소위 ‘종교개혁’ 이후의 객관적인 역사적 정황은 신뢰할 만한 사료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재구성되기 때문에 학자마다 견해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호렘헵이 투탕카멘과 아이를 충실히 섬겼으며 이후 왕위에 올랐다고 보는 견해도 당연히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국왕 시해의 범인은 누구일까요? 조금 맥 빠지는 결론입니다만 사실 처음부터 범인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2005년 1월 5일 카이로대학교 소아암학과 Department of Pediatrics Oncology 소속 하니 압델-라만(Hany Abdel-Rahman) 박사 감독 하에 투탕카멘 미라에 대한 CT 촬영이 시작되었습니다.*

엑스레이 검시 때와 마찬가지로 이동식 CT 촬영기가 왕묘 앞에 설치된 후 진행된 이날 검시에서는 총 1천700여 장 CT 영상이 촬영되었고 이후 3월 4~5일 CT 영상 판독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전문가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이 회의에는 취리히대학교 해부연구소 Anatomical Institute of the University of Zurich 프랑크 뤼흘리 Frank Röhli 박사와 함께, 1991년 이탈리아-오스트리아 국경에 위치한 알프스 빙하에서 발견된 5천300년 전 빙하기 남성 미라 외치 Ötzi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탈리아 폴 고스트너 Paul Gostner 박사와 에두아르드 에가르터-비글 Eduard Egarter-Vigl 박사도 참여했습니다.

투탕카멘 두개골



이 회의에서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이슈에서 의견 일치를 보였습니다.

CT 검시 결과, 투탕카멘 왼쪽 뺨과 목에서 말라리아 병원균(학명 Plasmodium falciparum)이 발견되었으며 따라서 소년왕이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였던 후두부 가격에 의한 사망설에 대한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각주 1: CT 촬영을 이용한 검시 이전에도 과거에 촬영된 엑스레이 사진을 자세히 검사한 결과 투탕카멘이 살해당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으나 더 정확한 CT 촬영을 통한 연구가 수행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평가한 보고서가 발표된 바 있습니다.]

또한 2010년 발표된 투탕카멘 왕가 프로젝트 King Tutankhamun Family Project 연구보고서에서도** 투탕카멘은 다리 골절에 따른 감염·말라리아·쾰러병 Köhler disease과 같은 복합적인 사인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쾰러병은 6~7세 아동에서 발견되는 희귀한 뼈 성장판 장애 질환으로 발뼈가 혈액을 공급받지 못해 괴사하는 골연골증 骨軟骨症 입니다.

발이 붓고 서 있거나 걸을 때 통증이 발생하면서 걸음걸이가 악화하는 쾰러병은 투탕카멘 왕묘에서 130여 개에 달하는 지팡이가 발견된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발굴 직후 투탕카멘 death mask



아울러 미라 DNA 분석에 기초하여 투탕카멘 골질환이 겸상兼床 적혈구 빈혈증 sickle cell anemia에 의해 유발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학적 소견 역시 제기된 바 있습니다.

[각주 2: 2007년 9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진행된 투탕카멘 왕가 프로젝트에서는 투탕카멘의 미라와 신원이 밝혀진 기원전 1410-1324년 사이의 왕가의 미라 11구를 대상으로 세부적인 인류학적 • 유전학적 조사와 함께 의학에 사용되는 각종 조영술(造影術)을 이용한 검시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울러 DNA 분석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투탕카멘 재위 시기보다 이른 기원전 1550~1479년 사이 왕실 미라 5구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 역시 수행되었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집요하게 누군가가 투탕카멘 다리를 고의로 부러뜨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앙케센아문이나 아이, 호렘헵과 같은 왕의 최측근이었다면 그를 살해하는 데 독살 혹은 교살과 같이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고 증거 역시 남기지 않는 다른 방법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결론적으로 투탕카멘은 세대를 거듭한 왕실 내 근친혼에 따른 DNA 풀의 약화로 인한 여러 만성 증상에 시달리다 결국 이른 나이에 이들 증세가 악화하면서 사망한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각주 3: 이와 관련하여 미라의 골반과 갈비뼈가 훼손된 점을 근거로 투탕카멘이 전차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을 것이라는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미라 제작 과정에서 흉부와 같은 부위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규명한 새로운 의학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현재는 학계에서 그렇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관련 가설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Alex Knapp, “Forensic Experts Claim That King Tut Died in a Chariot Accident,” Forbes Magazine: 2013/11/04, Web: 2014/03/03: https://www.forbes.com/.../forensic-experts-claim.../....]

끝으로 첨단 의학기술이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세계사의 여러 난제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데 더 많은 기여를 하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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