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1939년)가 왕묘 정리작업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유물이 카이로고고학박물관(Museum of Egyptian Antiquities)에 운송될 때까지 약 54,000점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 투탕카멘(Tutankhamun: 기원전 1336-1327년)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발굴작업 전후에도 식을 줄 몰랐고 이제 대중의 관심은 ‘소년왕’이 약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집트를 다스리다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이유는 무엇인가에 쏠리게 되었습니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왕묘가 발견된 지 3년 후인 1925년 11월 11일 투탕카멘 미라에 대한 부검이 시작되었습니다.
미라 보존 상태가 상당히 나빴기 때문에 부검을 맡은 더글러스 E. 데리(Douglas E. Derry: 1874-1961년) 카이로 국립의대(Government School of Medicine, Cairo) 교수는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다른 왕실 미라와 비교했을 때에도 투탕카멘 미라는 상태가 극도로 취약했습니다.
시신을 감싼 붕대는 대부분 부패했으며 회색으로 변한 피부 역시 크게 손상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제약에도 이 첫 번째 부검을 통해 투탕카멘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단 신장은 약 1.67미터였으며 몸매는 호리호리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아울러 사랑니와 골단(骨端) 접합(union of epiphyses) 정도를 조사한 결과 사망시점은 약 18세였던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더 정확한 조사를 위해서는 엑스선 촬영 같은 당시로서는 첨단 기법이 동원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1895년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 1845-1923년)이 엑스선을 발견한 이후 엑스선 검진방법은 점진적으로 전 세계에 보급되었으나(한국의 경우 1911년 조선총독부의원에 최초로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동식 엑스레이 장치가 아직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왕국시대 파라오 집단 묘역인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 안치된 투탕카멘에 대한 엑스레이 검시는 무려 43년 후에나 이루어지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1968년 리버풀 대학교(University of Liverpool) 해부학 교수인 로널드 G. 해리슨(Ronald G. Harrison: 1921-1983년) 박사가 마침내 투탕카멘 미라에 대한 엑스레이 검진을 수행했습니다(아래 그림 참조).
이 과정에서 해리슨 박사는 왕이 미라로 처리되기 전에 갈비뼈가 부러졌고 두개골 내부에 뼛조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해리슨 박사가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에는 머리와 목이 만나는 두개골 하단에 흐릿한 부분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대해 그는 이 흐릿한 부분의 엑스레이 농도가 정상치를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이 부분이 뇌막조직 하부에 출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왕의 후두부가 가격 당했을 가능성(살해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이 있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제시했습니다.
이와 같은 가능성에 대하여 롱아일랜드 대학(Long Island University)의 선임 연구원인 밥 브라이어(Bob Brier: 1943년-현재)와 같은 일부 이집트학자와 작가 기자 아마추어 호사가들은 엑스레이 사진에 나타난 이와 같은 특징들이 바로 투탕카멘이 살해되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이론에 따르면 투탕카멘은 그의 왕위를 노리던 누군가에거 후두부를 강하게 가격당했고 이 때문에 사망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투탕카멘을 시해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범인을 지목하기 위해서는 먼저 범죄 동기를 파악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질문 qui bono 즉,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가”를 제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투탕카멘이 죽음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본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우선 투탕카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왕이 서거한 후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그의 총리대신이었던 아이(Ay: 기원전 1327-1323년)였습니다.
그는 투탕카멘 할아버지인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 기원전 1390-1352년), 부왕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Amenhotep IV/Akhenaten: 기원전 1352-1336년), 신원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스멘크카레 = 네페르네페루아텐(Smenkhkare = Neferneferuaten: 기원전1338-1336년)을 비롯해 투탕카멘 이전 파라오들을 차례로 모신 노련한 정치가였지만 즉위 당시 이미 60세를 넘긴 상태였습니다.
불과 4년 재위 후 그가 사망하자 왕위는 투탕카멘 재위 당시 군 총책임자였던 호렘헵(Horemheb: 기원전 1323-1295년)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용의선상에 놓일 인물로는 일단 투탕카멘 왕비였던 앙케센아문(Ankhesenamun)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남편을 살해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강력한 가부장제를 고수한 고대 이집트에서 여성 지위는 대개 남편 지위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따라서 대왕비(Great Royal Wife)이자 (유산 사산한 두 딸 이외에는) 왕위를 이을 후계자도 없던 앙케센아문이 남편을 시해하여 자신의 몰락을 자초할 이유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당시 이집트 적국이던 히타이트 신왕국의 왕 수필룰리우마 1세(Suppiluliuma: 기원전1344-1322년)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습니다.
“제 남편은 죽었습니다. 저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수필룰리우마 1세]에게는 아드님이 많다고 합니다. 아드님 중 한 명을 저에게 주시면 그는 제 남편이 될 것입니다. 결코 제 종 중 하나를 골라 그를 남편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 ... 저는 두렵습니다.” (KBo V6, A ii: 10-15: Güterbock, 1956b: 94 = J. B. Pritchard, ANET, 319; Schulman, 1978: 47, no. 1).
이 외교 서신은 당시 고대 서아시아 외교관례에서 전례가 없던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타국 왕에게 “종” – 아이 그리고/혹은 호렘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을 골라 결혼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왕족으로서 혹은 적법한 왕권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자신의 지위를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으려 한 그녀의 절박한 태도로 미루어볼 때, 그리고 자신의 두려움을 당시 적국이었던 히타이트 제국 왕에게 그대로 토로하는 모습을 볼 때 그녀가 남편을 살해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국왕살해라는 대담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아이와 호렘헵 중 한 명 혹은 이 둘의 공모인 것으로 보입니다.
#투탕카멘 #하워드카터 #앙케센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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