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대 카나본 백작 조지 허버트(George Edward Stanhope Molyneux Herbert, Fifth Earl of Carnarvon: 1866-1923년) 경의 미망인 알미나 허버트 카나본 백작부인(Almina Herbert, Countess of Carnarvon: 1876-1969년)은 카나본 경이 사망한 후에도 발굴작업이 계속될 수 있도록 발굴 허가권 시한을 연장하는 데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따라서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 1874-1939년)가 현장을 계속 통제하면서 발굴작업을 계속해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카터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발굴현장이 아니라 정치 대외적 상황들이었습니다.
특히 카나본 경이 「타임즈」(The Times)와 체결한 독점 보도권으로 인해 「모닝 포스트」(The Morning Post)·「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와 같은 경쟁 언론사들은 물론, 이집트 국내 언론사들 역시 투탕카멘(Tutankhamun: 기원전 1336-1327년) 왕묘(KV 62) 발굴 상황을 제때 보도할 수 없었는데 현지 언론사들의 불만은 이집트 고대 유물을 영국인들이 배타적으로 점유한다는 이집트 대중의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1922년 영국으로부터 명목적인 독립을 성취한 이후 민족주의 성향이 고조하던 이집트 고고학청(Department of Antiquities) 내부 상황 역시 카터 발굴 팀에는 좋을 것이 없었습니다.
고고학청은 여러 가지 규제를 부과하면서 카터 발굴작업을 끊임 없이 방해했는데 이를 참다못한 카터와 발굴팀은 1924년 2월 당국의 각종 규제와 방해공작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발굴작업을 중단하고 왕묘로부터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치는 카터와 발굴 팀으로부터 발굴현장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하기를 원한 이집트 정부에게는 기다리던 호재였습니다.
이집트 정부는 즉각 왕묘를 1년간 폐쇄하기로 결정한 동시에, 발굴 허가권의 효력을 정지했으며 카터에게도 접근금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더 이상 발굴작업을 진행할 수 없던 카터는 그 기간 동안 미국과 캐나다에 체류하면서 발굴과 관련한 대중강연을 진행했습니다.
카터에게 시종일관 냉담했던 조국 영국과는 달리 미국과 캐나다 대중의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습니다.
그는 뉴욕·필라델피아·뉴헤이븐·볼티모어·워싱턴 D.C.·보스턴·피츠버그·시카고·클리블랜드·신시내티·디트로이트·토론토·몬트리올·오타와 등지를 돌며 순회강연을 했으며 워싱턴 D.C.에 머물 때는 당시 미국 대통령 캘빈 쿨리지(John Calvin Coolidge, Jr.: 1872-1933년) 초청을 받아 백악관을 방문했습니다.
아울러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명예회원이 되었으며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에서는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투탕카멘 왕묘에 대한 발굴작업이 1년 간 별다른 성과 없이 지연되고 카터를 대신할 인물을 물색하는 데 난항을 겪은 이집트 당국은 왕묘 유물을 안전하게 보존하면서 발굴작업을 철저히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은 카터밖에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925년 1월 13일 알미나 백작부인이 투탕카멘 유물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발굴 허가권을 갱신했는데 1930년에는 카나본 경이 발굴작업에 제공한 경비에 대한 보상으로 총 36,000파운드가 카나본 가문에 지급되었습니다.
또한 「타임즈」와 체결한 독점 보도권 역시 이때 철회되었습니다.
이런 조치 덕분에 카터를 비롯한 발굴 전문가들은 1925년 1월부터 현장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시작된 발굴작업 중 카터가 가장 주목한 유물 중 하나는 투탕카멘 두 번째 목재관이었습니다.
카터는 청금석·터키석·홍옥수·유리 등이 순금 틀에 세밀하게 상감된 이 두 번째 관에서 수레국화·맨드레이크·까마종이를 엮어 만든 화환을 발견했습니다.
이 화환은 투탕카멘 아내인 앙케센아문(Ankhesenamun)이 놓아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소박한 부장품에 대해 카터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겼습니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인간의 소박한 심정을 표현하는, 관 주변에 놓여 있던 작은 꽃다발이었다. 우리는 이 꽃다발을, 남편을 잃은 어린 왕비가 두 왕국을 대표했던 젊은 남편에게 바친 최후의 선물로 생각하고 싶다. 여기저기 황금빛 찬란한 제왕의 호화로움과 화려함 속에서, 아직도 아련히 색을 간직한 작은 꽃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었다.”
발굴이 재개된 이후 1930년까지 5년에 걸친 작업기간 동안 눈부신 인공 조명과 왕묘 속 탁한 공기에 카터는 건강이 계쇠 악화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도 그는 이집트 정부 관계자들과 매일같이 피곤한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난관에도 불구하고 카터는 발굴의 각 단계를 빠지지 않고 촬영하는 한편, 필요한 경우에는 본인이 직접 스케치를 그렸으며 전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와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카터는 방대한 보고서를 출간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에는 『투탕카멘의 왕묘』(The Tomb of Tut.ankh.Amun)를 비롯한 3권의 가벼운 대중서를 출간하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1932년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한 카터는 치료를 받기 위해 이집트를 떠났으며 영국에서 방광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귀국 후 요양생활을 하면서도 카터는 발굴작업 정리에 힘썼습니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 자신의 발굴작업을 녹음했는데 이것이 그가 남긴 유일한 육성기록입니다.
길고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카터는 1939년 3월 2일 사망했습니다. 또 한 번의 위대한 발굴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유명인이 영국 정부로부터 작위나 훈장을 받았지만 카터에게는 우체부나 철도원등과 같은 공공 서비스 종사자들이 은퇴하면서 받는 가장 낮은 5등급인 ‘대영제국 회원’(MBE: Member of British Empire) 훈장조차 수여되지 못했습니다.
생전에나 사후에나 그는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차가운 비가 내리는 날 당대 유명한 학자들 중 그 누구도 참석하지 않은 쓸쓸한 장례식에서 그는 런던 서부 퍼트니 베일(Putney Vale)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사진 설명: 하워드 카터의 무덤
사진 출처: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c/Howard_Carter%27s_grave_20200112_122445_%2849372577051%29.jpg" target="_blank" rel="noopener" data-mce-href="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c/Howard_Carter%27s_grave_20200112_122445_%2849372577051%29.jpg">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d/dc/Howard_Carter%27s_grave_20200112_122445_%2849372577051%2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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