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답사로도 이 고성이란 곳엔 와본 적이 없다. 공룡 발자국이 많기로 유명하다는 정도밖엔 몰랐던 셈인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존경하는 김충배 선생님 안내로 고성 땅 고찰 옥천사에 구경을 가게 되었다.
차를 타고 산이 품은 들을 가로질러 이리저리 휘돌아 들어가니 어느새 주변 풍경은 산중이다. 길옆 절벽은 켜켜이 쌓인 퇴적암 더미들인데, 동짓날 다음 날이라 그런지 팥시루떡 생각이 문득 든다. 근대 부산 지역의 명필이요 그 자신 스님 출신이었던 청남 오제봉 글씨 일주문 현판 앞에서 사진 하나를 찍는다.
절 옆 암자 청련암에 먼저 들렀다. 성보박물관장 스님이 계시다고 하여 인사를 드리고 차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절은 670년(신라 문무왕 10)에 의상이 창건한 화엄전교10찰 중 하나라고 한다. 그 이후 진각국사 혜심 같은 큰스님이 여럿 머물렀고, 근대로 내려와서는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성철과 함께 현대 한국불교 발전을 위해 노력한 청담이 1927년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는데, 그 인연인지 청담 사리탑과 비석이 절 한쪽에 자리하였다. 비문은 유불선에 달통해 따를 자가 없었다는 현대 학승 탄허가 짓고 썼다.
그 호쾌한 붓놀림에 잠시 감탄하다가도, 어느 국보에서 따고 어느 보물에서 빌려다 조합한 듯한 탑과 비석의 모습은 실망을 넘어 서글펐달까.
한때 승병이 주둔했다던 절답게 우람한 누각이 객을 맞는다. 보물로 지정된 '자방루'란 누각으로, 그 앞의 뜰에서 승병들이 훈련을 했다 하던가.
그런데 크기만 큰 게 아니라 세부가 어찌나 섬세한지, 거기에 옛맛까지 난다. 물론 최근에 약간 손을 보면서 새 자재가 들어가긴 했어도 그리 티는 안 난다. 객은 그 옆문으로 들어간다.
들어와서 드는 생각은 딱 이 한 단어였다. '웅숭깊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사물이 되바라지지 아니하고 깊숙하다"라는 뜻으로 나온다. 그 말처럼 건물 자리앉음이 무언가를 꽁꽁 감추듯이 되어있다. 의상이 창건한 다른 절, 예컨대 영주 부석사의 호쾌함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갑갑하다는 느낌은 아니다. 계단식으로 한 단 한 단 높여가며 건물을 두었기에 거기 올라서서는 첩첩 기와지붕 너머의 먼 산을 끌어들이듯 바라볼 수 있다.
경주 옥산서원 같은 폐쇄성을 갖추면서도 한수 위의 개방성을 보였다고 하겠다.
이 절 명부전의 시왕상과 인왕상, 나한전의 16나한상 모두 수준급이어서 조선 후기 조각사에서 언급할 만해 보였다(도둑 사절).
편액과 주련 글씨도 보통이 아니었는데 누구 글씨인지 조사는 되어 있나 모르겠다. 어떤 전각엔 마치 책거리 병풍에서 튀어나온듯한 벽화도 있었는데 그 연원은 과연 어디일지.
연꽃 안 화심에 푹 내려앉아 웅숭깊게 버티고 있는 절, 그러면서도 처지지 않고 옛 새로움이 있는 절,
김충배 선생님 덕에 좋은 곳을 알고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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