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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사천 선진리성을 가다(1) 벚나무의 유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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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 대구와 경남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무릇 기브가 있으면 테이크가 있어야 하는 법, 유적 다녀오고 글감이라도 얻어야 그나마 수지가 맞는다(물론 본전 생각 난다).

그러니 어쩌랴? 돈 좀 쓰더라도 다녀오는 수밖에. 마침 사천에 간다면 한 번 가 보고 싶던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사천 선진리 왜성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주둔하던 곳이다. 원래 여기엔 고려시대 이래 경상도 일대 세곡을 보관하는 조창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아래엔 조창을 지키기 위해 쌓았던 토성 흔적이 남아있다. 그러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년 난리에 일본군 손에 떨어지면서 이 자리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이 선진리 왜성에서는 두 차례 큰 전투가 있었다. 그 하나는 1592년 성 앞 사천만에서 벌어진 제2차 사천해전으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적선 13척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뒀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598년(선조 31), 명의 장수 동일원이 이끄는 3만 조명연합군이 이 성을 포위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여기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에겐 천운이 따랐다.

조명연합군의 탄약궤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한 틈을 타 시마즈 요시히로는 8천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와 연합군을 쳤다.

이때 죽은 조선군과 명군이 얼마나 많았는지, 전투 후 그들을 묻었다는 성 아래 '조명군총'의 크기가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로 인해 시마즈군은 살아나와 배를 탔고, 이어 노량에서 이순신을 만나게 된다.
 

완전한 왜식 성이다.

 
역사 이야기는 좀 있다가 더 하기로 하고, 일단 성에 들어가보자. 이순신의 간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성은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있다. 일제의 고적 안내비와 한국의 사적 안내비, 문화재자료 안내비가 죽 세워진 데서 뒤를 돌아보면 멀리 겹겹이 이어진 산이 보인다.

낮은 언덕이라고 무시할 수도 있지만 이게 바닷가 언덕이란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곳곳에는 나이든 벚나무가 가득하다. 여기의 벚꽃이 사천8경에 들 정도로 아름답다는데, 그 실상을 알고 보면 그리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이 성은 임란 이후 조선 수군이 주둔하며 썼다. 하지만 국운이 기울어 수군진이 폐지된 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펼치며 여기가 일본인 손에 들어간다. 그냥 일본인도 아니고 그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에게 말이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쓰마 번 다이묘(영주)였다. 그 후예들은 250여년간 사쓰마(오늘날의 가고시마 현)를 다스렸는데, 그곳은 이른바 메이지 유신의 '원훈'이 무더기로 나왔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시마즈 가문은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들은 조상 현창사업 일환으로 임진왜란에 주목했고,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가 주둔한 사천 선진리 왜성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 요시히로의 '승전'을 기리는 비를 세우고 벚나무를 심어 공원으로 꾸몄다.

예전에 얼핏 시마즈 가문이 이 선진리 왜성을 기부채납 형식으로 공원화했고, 그것이 이 땅에서 처음 행해진 기부채납이란 말을 들었는데 이는 자료를 찾아봐야 알 일 같다.

여기 벚나무엔 그런 사연이 얽혀있다.
 

 
사설이 길었다. 이제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보니...

뭔가 둥근 돌 하나가 보인다. 다가가 읽어보니 '매향비'란다. 옛 어른들은 향나무를 땅에 묻어두면 가라앉을 침자 침향이 된다고 생각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사람들은 한데 모여 향나무를 캐 땅에 묻었다. 평안한 세상이 오면 꺼내 태우며 부처의 강림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고려 말 세운 사천 매향비가 유명한데, 아마 그 본을 따서 2000년 어간에 사천시 차원에서 향나무를 묻었던가 보다.
 

 
아직 성문 안엔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너무 양이 많아졌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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