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 관료들은 해방 당시 인구 2천만 명 중 전문학교 이상 졸업자가 겨우 3만 명인 나라에서 뽑힌 인재들 치고는,
매우 유능했다는 것이 필자 생각이다.
일단 교육 정책을 보면, 이들은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해방 이전 고등교육 기관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대학 교육은 가용한 재원을 모아 서울대와 지방거점 국립대 중심으로 재편하여 편성하고,
나머지 대졸자는 과감히 사립대 위주 정책으로 50년대 이후의 대졸자를 급격히 늘려갔다.
이 과정에서 토지개혁으로 창출된 자작농이 경제적으로 부담할 수 있을 정도로 대학등록금을 억제하는 대신 (우골탑)
사립대에는 각종 국가 보조금과 혜택 (토지개혁 지주층의 교육재단 전환 장려) 을 주었다.
대신 국가의 제한된 재원은 초등교육에서 고등학교로 집중하여 60년대가 되면 초등교육 취학자는 완전취학률에 육박하였고
이렇게 급증한 학생은 중도 포기율을 낮춰 고졸 단계까지는 최대한 숫자를 늘릴 수 있도록 하였다.
정규교육에서 조기 이탈한 사람들은 공민학교, 심지어는 군대에서도 한글 교육을 하여
문맹률을 빠른 속도로 감소시켰다.
신생독립국에서 이렇게 계획적으로 교육정책을 수행하고 추진하여 단기간 내에 대졸자를 늘리고 문맹자를 떨어뜨린 나라 봤는가?
한국이 60년대 이후 괜히 경제개발이 되고 민주화가 된 것이 아니다.
한국의 50년대가 없었다면 박정희의 경제개발도, 김대중의 민주주의도 나올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진실로 50년대 한국의 관료들은 당시 수준으로 볼 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유능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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