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훈 (서울대 체질인류학 및 고병리연구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내 글의 주제가 될 라키가리Rakhigarhi 유적에 대해서 써보기로 한다.
앞에서 인더스문명기에는 모두 5개의 대도시 유적이 확인되었고 라키가리 유적은 인도에서 발굴 가능한 사실상 유일한 대도시 유적이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 유적은 20세기 후반, 우리의 문화재청+문화재연구소라 할 Archaeological Survey of India (약칭 ASI)에서 한번 조사를 해서 대략적인 관련 정보는 알려져 있지만 현재까지 제대로 된 발굴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이 유적지는 인도에서 인더스문명 이야기를 할때는 항상 가장 먼저 화제에 오를 수 밖에 없는 유적이었다.
아래에 라키가리 유적에 관련 된 위키피디아 설명이 자세하다. 한번 참고를 부탁드리고.
라키가리 마을은 택시를 타고 달리면 델리에서 대략 6시간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 인도의 도로 사정이 빠르게 좋아지고 있어서 지금은 더 빨라졌을 것이 확실하지만 이 부분은 자세하지 않다.
라키가리 마을이 위치한 지역은 인도 굴지의 밀밭 농사 지역이다. 실제로 이 지역을 가보면 인더스문명이 왜 그 오랜옛날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지금도 이 지역은 밀농사를 3모작을 한다. 우리가 라키가리 마을에 조사를 들어갔을 때는 1월이었는데 (인도는 더워서 겨울에 발굴을 주로 함. 겨울에도 해가 중천에 뜨면 더워서 못 팜.) 그때도 밀이 무럭 무럭 자라 익고 있어 조만간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수확을 1년에 3번을 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풍부한 생산력이 바탕이 되어주어야 인류 4대문명이라는것이 일어날 수 있구나. 절감하게 되는 한편 우리 조상님들이 얼마나 척박한 조건에서 조금이라도 더 농업생산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을지 고개가 숙여지는 순간이다. 요컨데 한국은 농사에 관한 한 금수강산은 절대로 아닌것이다.
라키가리 마을은 이런 밀밭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을을 실제로 가보면 전형적인 인도 농촌이다. 우리 연구실이 처음 이 마을에 들어간것이 2011년이었는데 2016년 들어갔을때 벌써 마을이 빠르게 변화하여 괄목상대 할 정도였다. 지금도 또 바뀌어 있을 것이고 10년 정도 지나면 아마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화해 있을 것이다.
이 항공사진 아래쪽 부분이 우리가 발굴한 곳이다. 사진 위쪽 부분의 마을이 오늘날 라키가리 마을. 우리가 발굴 한 곳은 인더스 문명시기 라키가리 대도시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 묻히는 공동묘지 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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