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역사상 폐불운동은 여러 번 있었다.
중국도 그렇고
일본도 불교 전래 이래 심각한 폐불운동이 불과
메이지유신 이후 폐불훼석으로 왔다.
지금 불교 사원이 즐비한 일본을 보면 믿어지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심각하여 이 당시 불타버린 불교사원도 드물지 않았던 모양이다.
불교가 동아시아에서 때때로 공격의 대상이 되었지만
꿋꿋이 버틴 이유에는,
첫째는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종교로서의 기능.
항상 번뇌에 시달리고 홧병에 고통받는 대중이 의지할 종교가 전무했던 당시,
불교는 이 부분을 충족시켜 항상 살아 남았고,
둘째는 그 심원고고한 불교철학 때문으로,
유학계열에서 가장 높은 차원의 철학경지에 도달한 성리학조차
불교에서 상당 부분 그 액시옴을 빌어와야 할 정도로
불교철학은 수준이 높았다.
따라서 일본 역시 폐불훼석 당시
웬간하면 신도로 불교를 대체하고자 했겠지만
신도의 철학수준으로는 불교를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결국 기독교에 맞서는 일본의 고유의 정신세계는 지금도 불교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여말선초-.
우리나라의 성리학 이해의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사서삼경 주자의 주도 이해를 완전히 못하여
그림을 그려가며 남겨 놓은 것이 권근의 입학도설이다.
주자가 주장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하고 이를 뛰어 넘기 시작한 것이
전술한 16세기-.
기라성 같은 거유들이 주자의 이야기를 파고들면서 비로소 그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여말선초의 폐불운동은 일단 때려 부수고 시작한 셈이다.
불교를 대체할 심원한 철학체계는 아직 완비도 안 된 상태에서
일단 불교척결부터 한 셈이 되겠다.
무엇이 그렇게 급했을까?
불교를 때려부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여말선초에 정말 그렇게 절실하게 있었을까?
물론 성리학의 논변을 이루는 기둥 중에 척불론이 있다는 것은 우리는 다 안다.
하지만 성리학이 주장하는 것을 여말선초에 전부 구현한 것도 아니다.
성리학의 주장이 완전히 구현된 시기는 16세기를 지나서이며,
17세기에 되어서야 비로소 체계화하고 현실 세계에서 구현되기 시작한 것도 많다.
유독 척불의 시기가 빠르다는 말이다.
왜 척불만 그렇게 급히 구현해야 했을까?
이것은 성리학이 원래 척불을 주장했다는 당연론과는 또 다른 질문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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