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중국보다도 복원된 고례古禮가 훨씬 많을 것이다.
이유는 임란 이후 조선의 유학자들이 이에 올인했기 때문이다.
성리철학 자체의 발전은 17세이 이후 지지부진했지만
중국유학에서도 공백으로 남은 예학의 발전에 조선유학자들이 이 시기 들어 올인했고
그 결과가 상고시대 존재했다가 사라졌다는 (사실 정말 있기는 있었는지 그것도 알 수가 없다)
많은 고례가 조선에서 수천년 만에 다시 부활했다.
이 고례란 중국의례를 가져온 것이 아니다.
중국에서도 이미 실전되었고 그래서 중국에도 참고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조선유학자들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남아 있는 문헌 몇 조각으로 고례의 복원을 시도했는데,
문헌에 남은 것이 별것이 없으니 복원은 논리적으로 최대한 가깝게 복원을 시도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향사례, 향음례, 친영례 등
수많은 고례가 조선에서 부활했고,
그 복원된 고례들이 조선의 전통의례로 인정받아
지금도 외국 관광객들 앞에서 공연 중이다.
다가오는 추석-.
한국의 지금 전통의례라는 것의 권위를 너무 믿으면 안 된다.
지금 제사상-.
극소수 반가를 제외하면 그런 식의 제사상이 차려진 것은 아마 백년도 안될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뜻이
조선성리학의 찬란했던 전성기는 16세기로
그 이후 나라가 망할 때까지 생산적인 논의는 나온 것이 없다.
심지어는 다산조차도
개혁론이라고 들고나온 토지개혁론은 20세기 인민공사를 연상시키는
여전제閭田制였다는 점
우리는 이를 심상하게 봐서는 안된다.
*** Editor's Note ***
자다가 두들긴 봉창이 저 예론禮論이다.
저 추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생죽음을 당했던가?
한국사가 세계에 대해 팔아먹을 상품은 저 비인간성이다.
왕이 죽었는데 상복을 몇년을 입어야 하느니 하는 문제로 상대방을 죽여야 한다는 극언이 자랑스럽게 나온 이 논리가 주는 비인간성을 팔아먹어야 한다.
우리 조상은 이리도 한심했다는 이것이야말로 K-history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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