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에서 드러나는 한국사 특징 중 하나가 전 왕조를 통털어 혼인시스템이 철저한 일부일처제 Monogamy 사회라는 점이다. 이는 동시에 남자가 마누라를 두 명 이상 둘 수는 없었다는 뜻이다.
위선 저와 관련한 기록이 가장 확실한 조선시대를 보아도 조선왕 27명 중 정식 부인으로 동시에 둘 이상을 둔 경우는 단 한 명도 없다.
그 많은 왕의 여인들은 간단히 말해 정식 부인은 한 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우수마발 첩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특정한 왕이 정식 부인을 둘 이상 둘 수 있으니 숙종은 셋이었고 숫자로는 둘, 하도 오래산 영조는 둘이었지만 동시에 마누라가 둘인 적은 없었다.
고려 왕조 역시 이러해서 초대 왕 왕건의 경우 창건주라는 특징에서 여러 왕비를 병렬로 둔 듯하나 개소리라 종묘 그리고 그의 무덤에 합장된 마누라는 오직 한 명인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
이것이 조금 이상하게 시스템 붕괴가 일어난 때가 몽골간섭기라 이때는 잠깐 일부일처제가 붕괴하는 듯한 흔적이 있으니 무엇보다 몽고가 대표하는 일부다처제 습속이 침투한 까닭이지만, 이 역시도 희한하게 고려에 들어와서는 제1왕비는 몽고 황제 딸이라 그 지위는 언터처블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
신라 고구려 백제 역시 그랬다. 다만 신라 하대에 잠깐 원비元妃니 차비次妃니 해서 이들이 병렬적 정식 부인 권리를 지닌 일부다처제 흔적을 보이기는 하지만 원비 차비니 하는 명칭 구별 자체가 일부일처제의 베리에이션 variation 임을 말해주는데 지나지 않는다.
곧, 원비 차비 혹은 제1비 제2비 따위가 보인다 해서 그것이 신라가 일부다처제였다거나 혹은 그런 성격을 가미하기도 했다는 증거가 결코 될 수 없다.
더 간단히 말해 저런 베리에이션은 신라가 철저한 일부일처제였음을 증명한다.
한데 우리가 저 베리에이션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기존 제도 혹은 관습을 교묘히 비트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오직 마누라는 한 명만 둔다 했지만 실행은 또 다른 문제다.
현실 여건에 따라 저 원칙은 고수하면서도 변형을 가해야 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공주의 하가下嫁다. 하가란 공주가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신하랑 결혼하는 일을 말한다. 이 경우 만약 그 남자가 유부남이면 어찌하는가?
이 경우 가장 흔한 수법이 공주를 제1 부인으로 앉히고 본래 조강지처를 첩으로 떨어뜨릴 수는 없으니 정식 부인 자리는 유지케 하되 제2부인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또 하나 왕이 친자매를 동시에 맞아들이는 때다. 이 경우 보통은 동생을 왕이 더 선호하기 마련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동시에 맞아들여야 하는 때가 있다. 이럴 때 원비니 차비니 하는 이름을 붙여서 둘한테 같은 정식 부인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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