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은 오랜 문화적 전통이 있는 나라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도 문자 사용의 증거는 2000년을 넘는다.
오랫동안 책을 펴내 읽었고, 고려시대에는 8만매가 넘는 목판 인쇄를 두 번이나 감행했고, 금속활자까지 발명해서 썼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지적 전통은 계속 이어졌다.
일정숫자의 독서인구가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과거제가 고려시대 이후 거의 천년이 이어졌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인색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착각하면 안되는 것은, 근세-혹은 근대의 "문맹률" 혹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지식의 보급"은 이러한 전통시대 문화적 역량과는 완전히 별개의 물건이라는 것이다.
낮은 문맹률은 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며, 근대국가가 작동하기 위해 뿌려야 하는 윤활유 같은 것이다.
문맹률이 낮다고 해서 최선진국 대열에 자동적으로 진입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문맹률이 높은 나라에서 근대이후 선진화가 성공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은 바로 이를 웅변한다.
그렇다.
해방 직후 한국인의 문맹률은 당시 "아프리카 수준"이었다 할 수 있다 (1950년 당시 우간다 문맹률 73퍼센트).
이 사실을 부끄러워 하기 전에, 그만큼 20세기 해방 이전 우리 조상들이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는 점을 동정해야 하고, 해방 이후 전국민 식자율 almost 100프로를 달성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끔보면,
해방이후 문맹률이 저렇게 높았을 리가 없다, 과장이라는 주장도 온라인상에서 보는데, 김 단장께서 쓰신 것처럼 문맹률은 당시 낮았을 수가 없다.
6.25때 포로가 된 인민군 심문 조서를 보면, 무학이 너무 많아 어처구니 없었던 기억이 있다.
1945년 당시 문맹률 75프로는 역사적 팩트이다.
여기서부터 한국 현대사 해석은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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