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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조선총독부 시정 25년사 구관舊慣 및 역사 조사와 문화 보존

by taeshik.kim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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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관 및 역사 조사와 문화 보존

1) 구관舊慣 조사

조선에서 구관 및 제도 조사는 1906년(明治39) 중에 구한국정부에서 부동산조사회不動産調査會를 [ 225] 설치하여 부동산에 관한 관습 조사를 시행한 것이 시초이다.

이어서 1908년(明治41) 법전조사국法典調査局을 설치하여 법학박사 우메 겐지로梅謙次郞를 초빙하여 민사民事와 상사商事며 전반에 걸친 관습 조사를 개시하게 하였는데, 총독부 설치 후에는 이 사무를 취조국取調國에서 계승하여 널리 일반의 구관 제도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1912년(명치45)에는 취조국을 폐지하고 그 사무를 참사관參事官 관장으로 옮겼다. 마침 그해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이 제정되었고, 그중에는 조선인의 능력, 친족 및 상속 등에 대해서는 관습에 따른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민사와 상사에 관한 각지의 관습을 조사해 왔다.

그리고 1915년(大正4) 5월에 다시 그 사무를 중추원으로 이관하였다. 중추원에서는 이를 관습·제도·풍속의 세 부문으로 구분하여, 실지實地 및 전적典籍에 대해 조사하였으며, 재판소와 기타 관청의 조회에 회답을 주고 있있다.





2) 조선사료 조사
조선의 사료史料를 조사·수집하고, 특히 조·일 관계의 진상을 이해하기 위한 반도사를 편찬하여 크게 융합동화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조선 사료 조사가 기획되었다.

그리하여 1916년( 대정 5) 1월부터 3년 안에 종료할 예정으로 이 사업이 개시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각 방면에서 예로부터 활동한 인물들에 대해 조사할 필요를 인정하여 이들 모두를 중추원에서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반도사의 편찬은(이상 221쪽) 예정대로 이루어졌지만 출판되지는 못했고, 인물 조사는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3) 고적 조사
조선에서 고적古蹟 조사는 1909년(명치 42) 구한국정부에서 탁지부 건축소의 사업을 위해 공학박사 쓰마키 요리나가妻木賴黃, 도쿄제국대학 조교수 공학박사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다니이 세이이치谷井濟一, 공학사工學士 구리야마 슌이치栗山俊一에게 반도 내의 고건축물 조사를 촉탁한 것을 단서로 한다.

당시 통감부 정치가 확립되고 지방제도가 완성됨에 따라 고건축물을 개조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었고, 이로부터 훗날 학계에 후회를 남길 수도 있음을 우려하여 미리 이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던 것이다.



조선고적도보



이어 조사 범위가 저명한 유물·유적까지 확장되어[226] 사업은 내무부 지방국으로 이관되었는데, 병합과 동시에 총독부 내무부 지방국 제1과에서 관장했다.

이 조사는 1914년(大正3)에 이르러 우선 조선의 모든 도道에 걸쳐 일반적 조사를 끝냈다. 조사 물건에 대해서는 그 연대와 기공技工 등의 측면에서 가치를 정해 갑·을·병의 3종으로 구별하고, 파손 정도와 물건의 품위 등급을 고려하여 총독부 토목국에서 해마다 막대한 국비를 들여 차례차례 수리하는 것으로 했다. 또 각지에서 수집한 고고 자료는 총독부에서 보존했다.

이로부터 반도에서 예로부터의 사적史蹟을 분명하게 함과 동시에, 미술·공예·풍속 등 각 방면에 결쳐 귀중한 참고 자료를 상당히 얻을 수 있었다.

또 위의 조사와 별도로 1911년(명치 44)부터 도쿄제국대학 이과대학 강사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에게 촉탁하여 유사有史 이전의 유물·유적에 대해 조사하게 하였으며, 그 사무는 학무국 편집과에서 관장했다.

이 외에도 참사관 분실分室에서 비문碑文·종명鐘銘 등 금석문 조사를 시행하였다.

위와 같이 조사 사무는 여러 방면으로 분속되어 그 연결과 통일이 결여된 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1916년(대정 5) 4월 해당 사무를 총무국으로 이관하고, 그해 7월 '고적 및 유물보존규칙古蹟及遺物保存規則'을 발포하여 그 감독을 업격하게 하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동시에 '고적조사위원회 규정古蹟調査委員會規程'을 정하였다.

이것이 실로 우리나라에서 고적·유물을 학술적으로 조사하고 국가의 힘으로 보존의 책입을 말게 된 효시이다.

또 그 성과는 1915년(대정 4, 이상 222쪽) 3월 조선고적도보 제1책 및 제2책을 출판·발행한 것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도보圖譜 및 고적조사보고서를 간행하였으며, 널리 내외의 중요한 곳에 송부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통치의 문화적 방면을 여실히 세계에 널리 알린 것은 총독 정치에서 하나의 자랑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후 고적조사위원회는 이 조사의 주체가 되었고, 역대 정무총감이 회장을 맡고 위원은 총독부 관계 부·국의 고등관 및 일본과 조선의 학식 및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에게 맡겨 순조롭게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조선 각 시대의 문화를 더욱 명확하게 할 수 있었다. 나아가 1916년(대정 5) 처음으로 행한[227] 한사군漢四郡 때 낙랑의 유적 조사는 다수의 귀중한 유물을 당시의 유적에서 발굴·채취하여 눈앞에서 한대漢代의 놀랄 만한 문화를 접함과 동시에 고대 일본의 문화와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가졌는가를 여실히 증명할 수 있었다.

4) 조선총독부박물관
1915년(대정 4) 9월부터 10월에 걸쳐 경성의 경복궁 내에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장내의 중앙에 벽돌로 지은 중층 건물煉瓦建重層의 미술관을 건립했다.

관내 중앙의 큰 홀에는 경주 남산의 약사여래좌상, 감산사 석불을 놓고, 주위 벽에는 유명한 석굴암의 인왕·보살·천제天帝의 모형상을 새겨 놓았다.


조선총독부박물관



1·2층의 진열실에는 삼국시대 이하 각 시대의 역사적·미술적 참고품을 진열함으로써 조선의 각 시대 미술 공예 및 문화를 소개했다. 그리고 공진회 종료 후 사전 계획에 따라, 이 미술관 및 구 경복궁전을 진열관으로 하여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설립했다.

이 박물관의 진열품은 고적 조사를 통해 발굴 또는 수집한 것을 점차 정리·진열하여 충실하게 하였다. 또 지방에 파손된 유명한 탑·비·불상 등은 자칫하면 완전히 잃어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남은 것들을 주워 모아 박물관으로 운반·이전하여, 한편으로는 대중들의 관람에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보존을 확실하게 한 것도 적지 않았다. [228] (이상 223쪽



조선총독부박물관 진열실




***

 
이상은

국역 조선총독부 30년사(상), 박찬승, 김민석, 최은진, 양지혜 역주 | 민속원 | 2018년 10월 23일

에 의거한다.

[숫자]는 원서 쪽수이며 붉은 숫자는 번역본 쪽수다.

상·중·하 세 책인 이 번역은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시정25년사』와 『시정30년사』를 번역하고 각주를 붙인 것이다. 개중 상·중 두 권이 시정25년사이며, 마지막 하가 시정30년사다. 시정30년사 전반부는 시정25년사와 겹치는 까닭에 이 겹치는 부분은 번역에서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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