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장영실을 어찌 볼 것인가?
이와 같이 훑으니 장영실은 그 아비가 테크노크랏으로 아마도 고려 말 무렵 국제정세 혼란기를 틈타 조선에 정착하니, 조선에서는 그를 붙잡아 두고자 관기를 아내로 주었던 듯하다. 이를 발판으로 장영실 역시 특히 광물학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동래현 소속 관노로 있다가 태종 시대에 중앙에 발탁되어 상경한다. 그가 죽 관적(官籍)을 둔 분야는 무반이었으니 이는 아마도 광물을 만지는 일이 무기 제조와도 밀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방원에게 굄을 받은 그는 세종한테도 총애를 얻어 때론 내시가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출세한 사건은 익히 알려졌듯이 자격루 제작이다. 자격루는 세종 자신이 직접 도안 설계했다. 하지만 이 설계를 구상으로 해체하는 일은 장영실이 담당했다. 따라서 자격루 제작 절반 이상의 공로가 장영실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때의 경험을 발판으로 그 얼마 뒤엔 역시 세종의 입안인 흠경각을 완성함으로써 장영실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질시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감독한 임금의 수레가 고장 난 일을 계기로 탄핵을 받아 곤장 60대 정도를 얻어맞고는 모든 직책이 회수되어 외방에 내쳐짐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를 근대 과학의 비조처럼 호명한 이는 국민국가 대한민국이다. 실상을 뒤척이면 그가 뉴턴이나 케플러가 될 수는 없다.
그는 광물에 조예가 깊은 광물 전문가요 시계 제조업자인 테크노크랏이었다. 과학혁명을 앞세운 근대 서구의 압도적 힘에 놀란 동아시아 근대는 그에 맞설 자생적 과학의 흔적을 찾다가 마침내 세종을 발견하곤 그에서 매몰한 장영실을 위대한 과학자로 호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장영실의 유산이 결코 의미가 없거나 작은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져야 할 몫은 그가 져야 하는 전근대 과학의 아버지라는 짐을 벗겨주는 일이다. 그는 전근대 사회에서는 흔치 않은 테크노크랏으로, 그 정점에 오른 인물이었다.
신분의 한계를 오로지 기술 하나로 극복하고자 몸부림쳤으며, 이 과정에서 자격루와 흠경각 제작이라는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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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시대의 장영실] (6) 자격루를 넘어 흠경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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