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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시대의 장영실] (6) 자격루를 넘어 흠경각으로

by taeshik.kim 2023.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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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루 작동원리

 
6. 자격루를 넘어 흠경각으로 

자격루를 제작한 장영실은 이번에는 다른 시계 제작에 나선다. 세종 20년(1438) 1월 7일 기사 중 하나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세운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다.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다.  

이를 기념해 세종은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그 기념비를 쓰게 하니 그 중 한 구절이다. 

상고하건대 제왕이 정사를 하고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서 세상에 절후를 알려 줘야 하는 것이니, 이 절후를 알려 주는 요결(要訣)은 천기를 보고 기후를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기형(璣衡)과 의표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상고하고 징험하는 방법이 지극히 정밀하여 한 기구 한 형상만으로는 능히 바르게 할 수 없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이 일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모든 의기(儀器)를 제정하게 하였는데, 대소 간의(大小間儀)·혼의(渾儀)·혼상(渾象)·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日星定時)·규표(圭表)·금루(禁漏) 같은 기구가 모두 지극히 정교하여 전일 제도보다 훨씬 뛰어나 오직 제도가 정밀하지 못하고, 또 모든 기구를 후원(後苑)에다 설치하였으므로 시간마다 점검하기가 어려울까 염려하여, 이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 한 간 집을 세웠도다. 

왕국 통치에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적한 대목이다.
 

혼천의

 
이어지는 대목은 흠경각에 설치한 시계의 실상을 증언한다.  

풀[糊]먹인 종이로 일곱 자 높이의 산을 만들어 집 복판에 설치하고, 그 산 안에다 옥루기(玉漏機) 바퀴를 설치하여 물로써 쳐올리도록 하였다. 금으로 해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는 탄자만 하고, 오색구름이 둘러서 산허리 위를 지나도록 되었는데, 하루에 한 번씩 돌아서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고 밤에는 산 속에 들어가며, 비스듬한 형세가 천행에 준하였고, 극의 멀고 가까운 거리와 돋고 지는 분수가 각각 절기를 따라서 하늘의 해와 더불어 합치하도록 되어 있다. 

해 밑에는 옥녀(玉女) 넷이 손에 금탁(金鐸)을 잡고 구름을 타고 사방에 서서, 인·묘·진시 초정에는 동쪽에 있는 옥녀가 금탁을 울리고, 사·오·미시 초정에는 남쪽에 있는 옥녀가 금탁을 울리며, 서쪽과 북쪽도 모두 그렇게 한다. 밑에는 네 가지 귀형(鬼形)을 만들어서 각각 그 곁에 세웠는데 모두 산으로 향하여 섰으며, 인시가 되면 청룡신(靑龍神)이 북쪽으로 향하고, 묘시에는 동쪽으로 향하며, 진시에는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에는 돌아서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동시에 주작신(朱雀神)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는데, 차례로 방위를 향하는 것은 청룡이 하는 것과 같으며, 딴 것도 모두 이와 같다.

이어 김돈의 글은 흠경각 시계를 자세히 묘사하지만 번거로워 생략한다. 아마도 자격루 제작이라는 이전의 경험이 흠경각 건설의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지금 태어났다면 스위스 명품 시계 제조업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흠경각 완성 뒤에는 다시 본연의 광물업자로 돌아간다. 세종 20년(1438) 9월 15일 실록 기사 중에는 경상도 채방별감(採訪別監)인 장영실이 “창원(昌原)·울산(蔚山)·영해(寧海)·청송(靑松)·의성(義城) 등지의 각 읍에서 생산한 동철(銅鐵)과 안강현(安康縣)에서 난 연철(鉛鐵) 등을 바쳤다”고 했다.

이 채방별감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해당 지역을 돌아다니며 광산을 개발하는 일을 하지 않았나 한다. 또한 정식 직책은 따로 있고 아마도 임시직인 듯하다. 

이후 장영실은 맨 앞서 본 그 사건, 다시 말해 임금의 안여를 부실 제작했다 해서 탄핵을 받고는 역사에서 영영 종적을 감추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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