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격루 제작과 출세
세종은 재위 15년(1433) 자격루를 제작한다. 그 아이디어는 놀랍게도 세종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자격루란 물시계 일종이다. 그 원리는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하지만 세종이 제아무리 명민한 군주라 해도 그는 설계자였지 제작자일 수는 없다. 그 아이디어와 설계도를 실제로 구현할 인물이 있어야 한다. 그 일을 장영실이 맡아 훌륭히 수행한 것이다.
하니 당연히 포상이 따라야 한다. 이해 9월 16일자 다음 기록은 그 포상을 정리한 것이다.
(임금이) 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행 사직(行司直)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蘇州)·항주(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그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를 시키고자 해서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 하고 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柳廷顯)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 하기에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했노라.
영실은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보다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나를 곁에 가까이 두게 되어 내시를 대신해 명령을 전한 일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으니 비록 내 가르침을 받아 했다지만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
고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김인金忍은 평양의 관노였사오나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시었고, 그것만이 특례가 아니오라, 이런 무리들로 호군 이상 관직을 받는 자가 매우 많사온데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를 통해 그의 출생이 비로소 의문을 풀어헤친다. 흔히 그를 일러 노비 출신이라 하는 근거가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그는 혈통으로 보면 중국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원나라 치하 중국 강남 사람이다. 그가 넘어온 시점은 아마도 고려 말, 혹은 조선 초였을 것이다.
그가 어찌하여 고려 혹은 조선으로 왔는지는 모르나 당시 혼란한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이런 이동은 흔했으므로 아마도 장영실의 아버지도 그런 혼란기에 무슨 일로 흘러들어왔을 것이다.
한데 그 어미는 기생이라 한다. 이 말이 곧 아버지 역시 미천한 신분임을 자동으로 말해주지는 않는다. 어머니가 기생이라는 말이 그 아버지의 정식 부인이 그 기생이라는 말은 아니다.
예컨대 정식 부인은 따로 있고 장영실은 첩인 그 기생에게서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 아버지 역시 그다지 신분이 고귀했던 듯 하지는 않다. 그랬다면 틀림없이 조선 조정에서도 중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번 금수저는 영원한 금수저라, 그것이 지방이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수는 없다.
나아가 기생인 그 어머니가 조선 사람인지 중국 사람인지도 확실치 않다. 문맥으로 보면 조선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이 어머니의 국적 문제는 장영실의 외국어 능력과도 밀접하다.
어머니가 중국 사람이었다면 그는 중국어에 능통했을 것이지만, 아버지만 중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다면, 그의 중국어 실력은 그다지 뛰어났다고 보기는 힘들다.
장영실의 성씨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張’이 아니라 ‘蔣’이라 표기한 점이다. 이 성씨가 그 전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외래계 성임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중국에서 이런 장씨로 저명한 이가 바로 국민당 총재 장개석(蔣介石)이다. 한데 더욱 공교롭게도 그는 절강성 출신이다. 장영실 아버지 출신지와 같다.
자격루를 완성한 다음 세종의 그에 대한 긍지가 자못 크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한다. 그는 중국의 자격루에 견주어 자신이 설계한 자격루가 그보다 훨씬 낫다는 점을 뽐낸다. 그러면서 그것이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 이룩한 성과라고 한다.
한글을 누가 발명했는지 논란이 좀 있지만 그 아이디어 대부분을 세종 자신이 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어려서부터 공부에 몰두하면서 사물을 의심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궁구한 성격 때문인지, 그는 무불통지(無不通知)였다.
그의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겨 그것을 만들어 낸 인물이 바로 장영실이다. 그것을 다름 아닌 세종이 직접 증언한다.
그런 까닭에 신화화한 장영실에 견주어 그 속내를 뜯어보면 장인(匠人)에 가깝다는 주장이 최근에는 잇따르는 것으로 알지만, 일부는 타당하지만 그렇지 않은 측면도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세종의 아이디어를 옮기기 위한 자격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그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장영실이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자격루를 만들 수는 없다.
그 절반 이상의 공로가 장영실에게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본다.
기생 소생인 그를 발탁한 이는 세종이 아니라 태종이다. 어찌하여 임금에게까지 눈에 띄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의 아버지를 의심한다. 그의 아비가 테크노크랏이 아니었을까 의심한다.
신분이나 학식을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중국 이민자가 조선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의 아비는 이런 계통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길이 없다.
장영실 역시 이를 발판으로 기술직에 근무한 듯하며, 그 과정에서 이방원의 눈에 띈 듯하다.
상의원이란 한석규 주연 영화를 통해 우리한테도 익숙하게 되어, 마치 임금의 의복을 만드는 일만 한 듯하지만, 실은 그 하는 일은 광범위해 왕실 전반에 소용되는 물품 제작 공급 관리처였다.
뛰어난 기술을 발판으로 장영실은 세종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급할 때면 내시 대타로 그를 써먹기도 했다.
이런 총애를 발판으로, 더구나 자격루 제작을 계기로 어미가 기생인 천출 장영실은 출세를 위한 가도를 닦기 시작한다.
그 공로를 발판으로 정4품 호군(護軍)에 임명된 것이다. 정4품이 암 것도 아닌 듯이 생각되지만, 당시 그보다 상급에 있는 관리는 몇 명 되지 않은 반면, 당시 조선 인민 전부가 품계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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