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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조선 중기의 충주박씨 거물들 박상-박순 초상화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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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신 박상·박순 초상화, 전북유형문화재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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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신 박상·박순 초상화, 전북유형문화재 지정

(익산=연합뉴스) 백도인 기자 = 전북 익산시는 조선시대 문신인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의 초상화가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275호와 제276호로 각각 지정됐다고 2일 밝혔다.박상은 병조좌랑, 상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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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 중기 정치사 한 축에 담당한 박상과 그의 조카 박순 초상화가 남은 줄은 몰랐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다 치고, 그런 그네들 초상화가 전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는 소식이 우리 전북본부발로 전해지기에 살피니 문중에서 1970년에 원광대로 기증됐다 하거니와 

 

초상화에는 그 어떤 조예도 없는 내 말을 새길 필요는 없겠거니와, 어째 조선후기 임모본 아닌가 하는 막연한 느낌을 준다. 그에 대해서는 지정을 위해 조사를 수행한 사람들이 잘 판단했을 것이로대, 암튼 저 두 사람은 조선중기 정치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는 하나, 동시대를 주름잡은 다른 사람들, 예컨대 조광조가 대표하는 사람이라든가 그 반대편에 위치한 이른바 훈구대신들에 견주어서는 일반 지명도가 현격히 떨어지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녹록치 아니하는 위상을 지닌 충주박씨 인물들이거니와, 애초 지역 기반은 호남이다.

 

먼저 박상朴祥은 자를 창세昌世라 하지만 눌재訥齋라는 호로 잘 알려졌으니 1474년, 성종 5년에 태어나 1530년, 중종 25년에 몰했다. 과거에 당당히 등수 안에 들었지만, 생전에 역임한 관직이라고는 담양부사니 순천부사, 나주목사 같은 지방관이 대부분이었다. 

 

 

눌재 박상 초상

 

 

그가 결정적으로 이름을 날린 사건은 중종 반정에 쫓겨나 폐서인 신분으로 죽은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를 복권하자는 상소를 올린 일이거니와, 보통 이런 일은 혈기방장한 서생이 주도하거니와, 박원종朴元宗을 비롯한 중종 반정공신들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 이런 담대한 주장을 들고 나온 것은 진짜로 또라이이거나, 아니면 대의명분에 충실한 원리주의자이거나 둘 중 하나로 봐야 할 것이니, 나는 둘 다로 본다. 

 

당연히 쫓겨났지만 이걸로 이름은 날렸다. 조광조와는 일당은 아니었던 듯하지만, 그네들과 의기를 같이한 듯하며, 이때문에 1519년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일당이 처단되었을 적에는 모친상으로 물러나 있었던 사연도 있고 해서 크게 피해를 본 듯하지는 않지만 않지만, 그렇다고 타격이 없지는 않았다. 암튼 세상과는 타협이 쉽지 않은 인물이었던 듯하다. 

 

박상은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삼는 조선사회에서는 족적이 엄청나게 크다고 알거니와, 그보다는 약간 연배가 늦은 면앙정 송순이라든가 하서 김인후와 어깨를 겨루는 위상을 지닌다고 들었다. 특히 고봉 기대승이 그의 학맥 잇기를 자청한 것으로 알거니와, 문학이라는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사암 박순 초상

 

 

그의 조카 박순朴淳(1523~1589)은 자를 화숙和叔이라 하고 호는 사암思菴이라 하거니와 당대 양대 산맥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양쪽 문하를 들락했다. 어릴 적에는 서경덕한테도 수학했단다. 박상과는 달리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이조판서, 한성부 판윤,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꽃길만 걸었다. 특히 정승 자리에만 내리 14년을 지내고 개중 영의정에만 7년을 봉직했으니 말이다. 

당쟁의 와중에 대략 10살 정도 어린 서인의 주축들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과는 아주 가까워 같은 당색으로 지목되었으니, 이는 그의 동문과 문하생들과 갈라지는 계기로 작동한다. 호남을 택한 박상과는 달리 말년에 포천에 정착한다.

 

이 두 사람 초상이 어찌하여 원광대로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내가 살피지 아니해서 모르겠다. 다만 그네들 초상이 남았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생소라, 모르는 얘기들을 두서없어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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