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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한성백제박물관 <왕성과 왕릉> 특별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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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풍납통성 발굴을 계기로 한성백제문화 소개를 위한 전문박물관으로 한성백제박물관을 몽촌토성 인접지점에 문을 열기는 2012년 4월 30일이었다.


 

풍납토성 성격 단면과 판축 상상도

 


이곳이 자리한 송파구에는 한성백제 왕궁 겸 왕성임이 확실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있고, 왕을 비롯한 지배층 공동묘지임이 확실한 석촌동고분군이 있기에 이런 전문박물관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조사기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풍납토성은 중앙정부인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전담하고, 나머지는 한성백제박물관이 하는 시스템으로 자연스럽게 업무 분장이 이뤄져 오늘에 이른다.


 

 

 

 

조사연표

 



한성백제박물관은 몽촌토성과 석촌동고분군 발굴에 집중했으니 이 중 전체구역이 사적으로 묶였고 공원으로 조성되어 이렇다 할 보호장치가 필요없는 몽촌은 순전히 학술연구차원에서 80년대 발굴이 워낙 개판이었던 까닭에 새로운 발굴이 필요했던 반면, 석촌동고분군은 느닷없는 맨홀 퐁당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느닷없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석촌동 조사 신호탄이 된 2015년 맨홀 퐁당 사건

 



박물관이 마련한 왕성과 왕릉 특별전은 한성백제박물관 출범 이후 이 박물관이 이룩한 두 군데 발굴성과의 중간점검이다. 따라서 제목이 표방한 왕성은 몽촌이고 왕릉은 석촌동이다.


 

宮 새김 그릇
관내용官內用 글자 새김 그릇. 관용 장비란 뜻이다.
官 새김 그릇. 관용이니 사사로이 쓰지 말란 뜻이다.

 



다른 기관에 의한 조사는 철저히 배제했고 오직 저 두 군데 자체 성과만을 정리하려 했다는 데 이번 특별전 특징이 있다.


 

 



한성백제박물관은 역사가 일천한 데 따른 약점 혹은 아쉬움을 노출하곤 하는데 이는 기간 특별전에서 대체로 드러났거니와, 백제고고학과 백제역사학 전공자들이 여전히 주축을 이루는 곡절이라 이해하고 싶다.


 

전돌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상당한 품격을 갖춘 건축물에 사용하는 까닭이다.
이 무수한 기와를 비롯한 건축자재들은 무엇을 웅변할까? 더구나 무덤에서 나왔다는데?

 



이들의 기간 전시는 너무나 고고학적이라 새로운 문화재 전시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거니와,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것과 그것이 일반시민사회에 팔리는 문화상품인가는 전연 별개다.


 

화장 흔적을 보여주는 인골
말뼈는 희생의 흔적이리라

 



그런 점에서 이번 특별전 역시 "고고학적"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는 힘들다고 본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어떻게 하면 고고학을 활용해 한성백제를 시민사회에 돌려줄 것인가 하는 고민이 곳곳에서 묻어난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이어니와 향후 더 좋은 발전이 있으리라 기대케 하는 대목이다. 


 

절구 종류인데 약절구도 생각해야 한다.
일본쪽 스에키 종류로 보는 듯
그릇 받침대인데 이런걸 산사람이 썼겠는가? 귀신용이다.

 

 

 

특별전 주제가 '왕성'과 '왕릉' 두 가지이듯이 특별전 또한 크게는 몽촌토성이 대표하는 왕성 코너와 석촌동고분군을 중심으로 꾸민 왕릉 섹션 두 지점으로 나뉜다. 


 

이것들도 어째 귀신 냄새가 난다.

 

 

 

유의할 점은 석촌동고분군이 철저히 한성백제가 전유專有하는 데 견주어, 몽촌토성은 한성백제 흔적이 매우 두터운 가운데서도 고구려 흔적이 더러 있고, 그 이후에는 신라가 남긴 흔적 또한 녹록치 아니하는 복합유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따라서 이번 특별전 몽촌 코너에서는 백제를 중심으로 고구려, 신라로 문화층을 나누어 그 성과를 소개한다. 


 

고구려 냄새가 난다.

 

 

 

덧붙여 석촌동은 말할 것도 없이 사자死者와 신령神靈을 위한 귀곡산장임에 견주어, 몽촌토성은 철저히 산 자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이는 출토 유물에서도 비교적 뚜렷이 갈리거니와, 몽촌이 산 사람들을 위한 흔적이 녹록한 반면, 석촌동은 철저히 죽은자를 위한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신라 쪽이다.

 

 

 

그럼에도 유의할 점이 또 있다. 왕릉 역시 죽은 왕들이 사는 사후세계 궁전이라는 점에서 생전 궁전인 몽촌토성과 일맥으로 상통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한성백제인들의 먹거리 코너를 마련한 대목을 나는 좋은 시도로 평가하고자 한다. 


 

대체로 귀신용이다

 

 

 

같은 맥락에서 석촌동이 정말로 철저히 죽은자들을 위한 귀곡산장인가는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나는 석촌동 일대를 삶의 세계와 유리한 저승세계로 보지 않는다. 실제 발굴성과를 볼 적에도 무수하면서도 다종다양한 기와유물이 쏟아졌거니와, 이는 단순히 능상陵上 건축으로 볼 수는 없으며, 지금은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든 이 공동묘지는 실상은 능시陵市이기도 한 흔적으로 본다. 


 

말대가리

 

 

 

석촌동에서 실은 무수한 기와가 쏟아지기는 70년대 서울대박물관 조사에서 드러났다. 다만, 하도 발굴이 개판을 쳤는지,그런 유물들 실체가 2010년대 들어와 비로소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데, 그 보고서를 보면, 70년대에 이렇게 많은 기와유물이 쏟아졌나 경악하게 된다. 그런 유물들을 꽉 움켜쥐었으니, 환장할 노릇 아니겠는가? 듣자니 그런 기와더미 중 일부는 당시 대학가 격렬 시위에서 장돌 대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아무튼 석촌동고분군은 간단히 말해 그런 공동묘지를 관리하기 위한 무수한 인력이 필요했으며, 그 인력들을 관리하기 위한 별읍別邑이 분명히 석촌동 일대에는 있었다는 것이다. 그 흔적이 저 무수한 기와더미가 웅변한다고 본다. 나는 한성백제박물관이 파헤친 석촌동 유구가 모조리 무덤이라는 추정 혹은 주장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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