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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지광국사 현묘탑은 그 탑비의 변상도 (by 김태형)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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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조사하고 연구해봐야 신빙성있는 썰이 되겠지만 일단은 여기까지 정리를....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암튼 뭐 그렇게 보았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사설......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 도상 분석

1. 탑과 비석의 선후 관계

탑비는 1085년 건립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비문이 지어진 시기는 고려해 볼 문제다.

비문 음기에 ‘단직(單職) 등 52명은 지광국사 입적 전후에 입적(入寂)한 스님들이다’라는 부분과 정유산(鄭惟産)이 비문을 짓게 된 과정을 설명한 내용으로 볼 때 비문은 1080년 이전 그가 관직에 있을 때인 1077년(이때 판상서예부사(判尙書禮部事)로 임명)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유산이 지병을 이유로 1080년 관직에서이 비 물러나 1090년 죽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한다면 탑의 조성과 비문의 작성은 이 비문의 내용이 탑의 변상도를 위한 텍스트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2. 도상분석

1) 탑의 도상

① 동쪽과 서쪽면

동서쪽의 도상은 동일한 도상으로 구름 속의 용과 구름위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먼저 용이 등장하는 도상은 비문의 ‘세수는 87세요, 승랍은 72세였다. 입적(入寂)하던 전날 밤에 등불 만한 크기의 두 개의 별이 나타났고, 또 두 줄기의 큰 무지개가 섰는데, 마치 두마리의 적룡(赤龍)이 나란히 누워 있는 것과 같았다’는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구름 위 인물상들은 ‘부음을 들은 문종(文宗)은 크게 진도(震悼)하시고 곧 좌가승록(左街僧錄)인 숭연(崇演)과 보장정(保章正)인 전삼린(全參藺) 등을 파견하여 장사(葬事)를 감호하도록 하였으며, 이어 전개(專介)인 특사를 보내서 빈당(殯堂)에 가서 조문토록 하되 정중한 탁제(卓祭)를 치르도록 하는 한편, ‘지광(智光)’이라는 시호를 증정(贈呈)하고 아울러 다향(茶香)과 유촉(油燭)을 하사하였으며, 또 원주(原州) 창고에 있는 양곡으로써 발천위락(拔薦爲樂)의 법요식(法要式)에 필요한 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1월 9일 법천사(法泉寺)의 명봉산(鳴鳳山) 동쪽 승지(勝地)를 선택하여 다비(茶毗)의 예를 거행하였다’는 장면으로 보인다.

② 북쪽면

산과 구름이 가득한 북쪽면의 도상은 상세한 도상분석을 하지 못해 무어라 단정짓기 힘들지만 산중에 보이는 인물상과 주변의 구름 등으로 볼 때 이는 국사의 입적 당시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 ‘이해 10월 23일 편안히 우협(右脇)으로 누워 취침하였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국사께서 잠을 깨어 가부좌(跏趺坐)를 맺고 앉아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결락)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니 대답하기를, “이슬비가 내리고 있읍니다.”라는 대답을 듣고서 곧 입적하였다. 옛적 추자(鶖子)가 입적(入寂)함에 당하여 무색계(無色界)의 제천(諸天)이 흘린 바 눈물이 마치 봄에 내리는 이슬비와 같았으니, 지금 국사께서 시화(示化)하던 오늘밤에 내린 비인들 어찌 제천(諸天)이 흘린 눈물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특히 본문 중에 우협으로 누웠던 국사가 잠에서 깨어 가부좌를 맺고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입적한 장면이 주목된다.

③ 남쪽면

남쪽면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확인되는 사리 이운移運 도상이다. 기존에 경주 금장대 석조 기둥과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등에 새겨진 도상을 사리공양과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명백한 향로 즉 향공양 도상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돈황석굴을 비롯하여 국내 석불 대좌에 조각된 여타의 다른 도상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문제는 사리를 이운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복식과 머리 모양 등으로 보아 고려인이 아닌 서역 등의 외국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비문에서 등장하는 ‘대소관원(大小官員) 전재(筌宰)들은 여탄(茹歎)하였고 오장육부(五臟六腑) 오려내듯 슬퍼하였다. 여이(黎夷)들도 너나 없이 애통함이여! 부모잃은 아이처럼 통곡하도다’라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사의 사리 이운에는 귀천이 없이 동참했음을 의미하는데, 먼저 관(冠)을 쓴 인물들은 ‘대소관원(大小官員) 전재(筌宰)’, 관을 쓰지 않은 인물들은 ‘여이(黎夷)’ 즉 일반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冠의 형태와 백성들이라 칭했던 여이의 머리 모양은 고려불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은 일단 사진으로만 판단한 도상분석이라 향후 실물 혹은 탁본 등을 실견할 기회가 있다면 더욱 명확해 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비석의 도상은 중앙에 꽃과 보배 열매가 열린 나무와 좌우에 삼족오와 토끼가 새겨진 해와 달, 그리고 공양비천상 등이 보인다.

해와 달의 도상은 1021년에 조성된 개성 현화사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또한 좌우의 봉황문양도 개성과 칠곡 대각국사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도상은 11세기 고려의 승려 탑비에 등장하고 있는데 비문의 ‘무상대교(無上大敎) 그 진리를 널리 펴시니 십이부류(十二部類) 중생들이 서열(胥悅)하도다. 자성천(自性天)의 혜일광명(慧日光明) 두루 비추니 언덕마다 골짝마다 밝아졌었네! 자비하신 구름으로 윤택케 하되 쑥과 난초(蘭草) 차별 없이 적셔주었다’라는 내용처럼 국사의 업적을 장엄하게 그려낸 것으로 보인다.

애초 삼족오를 담은 해를 보고 국사의 탄생과 연관된 ‘국사는 일자분정(日蔗分精), 즉 태양의 정기를 타고 났으며, 연꽃과 같은 향기롭고 아름다운 성품을 받아 태어났다’는 내용과 연관지어 보았으나 그보다는 앞서 언급한 비문 말미를 극적으로 묘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청 홈피에서 인용)

*** (台植補) ***

간단히 추리자면 법천사 지광국사 조사당 마당을 장식하는 그의 부도탑과 탑비는 긴밀한 세트라는 것이다.

현재 탑비만 섰고 그의 부도탑은 지난 백년을 유리걸식하다가 현지 반환이 결정되었다.

이에 즈음한 지난 5월 28일 관련 학술대회에서 토론자인 김태형 송광사성보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부도탑 문양은 탑 비문의 변상도라는 파천황적 주장을 제기했으니 이 글은 그에 대한 좀 더 상세한 그의 변론이다.

간단히 말해 탑비에 적힌 텍스트가 스크립트라면 부도탑을 장식한 각종 그림이 그것을 시각화한 것이라고 한다.

누구도 이런 발상은 하지 못했다. 이 담대한 문제제기를 두고 향후 논쟁이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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