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계절의 노래(32)
초여름[初夏] 세 수 중 첫째
[송(宋)] 왕자(王鎡) / 김영문 選譯評
붉은 꽃 거의 져서
나비 드물고
쏴 쏴 비바람이
봄날 보내네
녹음은 우거져도
보는 이 없고
부드러운 가지 끝에
매실 열렸네
芳歇紅稀蝶懶來, 瀟瀟風雨送春回, 綠陰如許無人看, 軟玉枝頭已有梅.
봄이라 만발한 꽃잔치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런 꽃이 다 질 무렵, 꽃 중에서도 개화시기가 가장 빠른 매화는 벌써 매실로 바뀌었다. 그렇게 계절은 바뀌어 벌써 초여름 들어서는 문턱이다. 떨어지기 싫어서인가? 아님 따지기 싫어서일까? 매실 역시 초록으로 같은 초록 이파리와 밑에 살포시 숨었다. (2018.05.16.)
백일홍처럼 석 달 열흘 동안 꽃을 피우는 꽃나무도 있지만, 대개 봄꽃은 일주일 정도 지나면 시들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열흘 붉은 꽃은 없다(花無十日紅)”라는 말도 생겼을 터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 찾아볼 수 있는 최초의 시는 중국 송나라 조변(趙抃)의 「상천축사 석암화(上天竺寺石巖花)」이다. “곧 바로 봄날이 한 달 동안 극성할텐데,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그 누가 말하는가(直將春占三旬盛, 誰謂花無十日紅)” 그러나 “그 누가 말하는가(誰謂)”라는 이 시의 어투로 짐작해보건대 당시에 이미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도 “열흘 붉은 꽃은 없다(花無十日紅)”란 구절은 “권력은 십년을 못 간다(權不十年)”란 말과 함께 마치 속담처럼 흔히 쓰인다. “좋은 때나 전성기는 길지 않다” 또는 “잘 나갈 때 조심하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기실 꽃나무의 일 년을 살펴보면 꽃은 열흘 정도일 뿐이고 봄과 여름 내내 자신의 온몸을 장식하는 건 모두가 녹색 잎이다. 나비도 찾지 않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자기 자리에 서서 잎이 드리운 녹음 속에 꽃이 남긴 열매를 보듬어 기른다. 녹음이야말로 “열흘 붉은 꽃”에 비길 수 없는 꽃나무의 일상이자 존재 그 자체다. 『중용』에서는 이를 “드넓게 존재하면서도 감추어진 진리(費而隱)”라고 했다. 그야말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지극하다(無聲無臭, 至矣)”는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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