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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누암리 고분군, 우륵~강수 시대 신라 중원경을 주름 잡은 사람들의 저승 종족 공동 주택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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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암리 고분군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신라 진흥왕본기에 이르기를 이 왕 재위 18년(557)에 국원國原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했으니,

국원이란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일대를 지칭하는 당시 지명이요, 소경이란 지금의 경주가 신라 왕국 전체의 도읍인데 견주어 지방 주요 거점에 설치한 거점 작은 왕성이라는 뜻이라, 수도에 대한 부수도라는 개념이다.

당시 신라 지방행정 시스템을 보면 현대 대한민국의 그것과 똑같아서, 신라의 경우 전국을 주州로 분할하니 이것이 지금의 광역자지단체 중에서도 도道에 해당하며,

그와 더불어 국원과 같은 주요 거점 대도시는 소경이라 해서 그것과는 구별하는 특별도시를 행정구역으로 별도로 관리했으니, 지금의 대한민국 지방행정 구역 중에서는  부산 대구 인천광역시 같은 데에 해당한다.

그런 까닭에 주州 장관과 소경 장관은 관계가 병렬이었으니, 서로에 대한 권한 침해를 하지 못했으며 이들은 중앙에 설치된 지금의 행안부 같은 조직을 통해 왕의 직접 통제를 받았다.

소경은 금관가야가 자발로 항복하고선 그 옛 도읍 금관(지금의 김해)에 설치한 대도시의 경우는 특별한 활성화 대책이 크게 필요는 없었겠지만,

중원과 같은 새로 만든 소경은 무엇보다 일정 규모 이상 인구를 갖추어야 했으니, 없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질 리는 만무하고, 대체로 사민徙民이라 해서 강제 주민 이주 정책을 써서 도시를 채웠다.

누암리 고분군


사민 대상은 여러 갈래가 있었으니, 전통으로 애용한 방식은 정복한 지역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케 하기도 하고, 나아가 각종 범죄를 저지른 처치 곤란 죄수 같은 이들을 강제로 옮겨놓기도 했으니,

물론 이들을 관리 통제하기 위해서는 중앙에서 직접 사람들을 파견해야 했다.

이 마지막 경우는 그들에 대한 대우가 문제였으니, 예컨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로 그곳이 마음에 들어 아예 현지에 뿌리를 내리기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기회를 찾아 자발로 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에 대해 중앙정부는 각종 특혜를 주어야 했으니 무엇보다 공짜로 혹은 헐값에 땅을 개간하고 그 땅을 주어 그네들을 현지화함으로써 중앙 지배를 관철하고자 했다.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기도 하니, 이는 필연이었다.

이 점에서 국원경은 그런 흔적들을 편린으로 남긴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주시해야 하는 신라 지방 대도시라,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제1에서는 신라고기新羅古記라는 정체 불명 문헌을 끌어다가 이르기를

우륵于勒이 그 나라(가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들고서는 신라 진흥왕眞興王한테 귀부하니 왕이 그를 받들어 국원國原에 안치케 했다 하거니와, 멸망한 가야 유민 우륵과 그의 제자들을 왜 하필 국원에다가 거주케 했겠는가?

중원경 출신으로 또 한 명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중고시대 신라인으로 쇠대가리 강수强首가 있으니,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제6에 이르기를 그의 출신을 중원경中原京 사량부沙梁部라 하며, 아버지는 석체昔諦라는 이로, 벼슬은 나마奈麻를 역임했다 했다.

누암리 신라고분


강수는 우륵보다 대략 100년 뒤 사람이라, 그의 선조가 어찌하여 중원경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지방 대도시 출신이 태종무령왕 시대에는 중앙에 진출해 문한文翰을 주름잡았다는 사실은 이제 신라가 경주를 벗어나 인재 배출이라는 측면만 해도 지방이 일정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좌라 하겠다.

중원경 설치 직후 우륵시대를 거쳐 강수시대에 걸쳐 중원경을 주름잡은 사람들은 어디에 묻혔으며, 그네들은 무덤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충주 누암리고분군이라는 유산을 우리가 주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른다.

이 무덤떼가 바로 우륵에서 시작해 강수에 이르는 시대 중원경을 주름잡은 지역 토호들이 남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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