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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충주 호암동 초기철기시대 통나무 목관묘와 세형동검 발굴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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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호암동 목관묘 출토유물 일괄



고고학계에서 대략 기원전 300년 무렵에 시작해 기원전후까지 지속한다고 보는 한반도 초기철기시대는 말 그대로 금속기라는 측면에서는 철기가 본격 등장하기 시작하고, 무덤에서는 목관묘(木棺墓)를 특징으로 삼는다고 알거니와, 이런 목관묘 중에서도 이른바 지역 수장급 무덤으로는 더러 통나무를 이용한 관이 보이기도 한다. 


이런 통나무 목관묘로 그 실물까지 고스란히 볼 만한 곳으로는 의외로 적어, 창원 다호리 1호묘 정도에 지나지 않고, 다른 데서는 통나무 목관을 안치한 흔적만 드러날 뿐이다. 더불어 이런 통나무 목관묘는 생각보다는 확인 사례가 드물다. 그런 사정에서 2015년이 개막한 직후 한국고고학계에서는 느닷없이 충북 충주에서 그런 통나무 목관묘 출현 소식을 전했으니, 이 통나무 목관묘는 비록 그 목관은 흔적만 희미하게 남기고는 그 장구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지만, 그에 부장한 각종 청동기를 쏟아냈다. 



파경破鏡




한마디 더 덧붙이건대, 초기철기시대라 하지만, '초기'라는 말이 주는 어감에서 엿보듯이, 이 시대 금속기는 철기보다는 여전히 청동기가 압도적 비중이 많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충주 호암동 통나무 목관묘 출현소식이 언론에 공식 배포된 시점은 오늘로부터 꼭 4년 전인 2015년 1월 19일이었다. 그 중요성을 감안해 그 발굴성과 공개하는 행사를 문화재청이 직접 주관했으니,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 전날 미리 충주발로 관련 기사를 써두고는 당일에는 룰루랄라 콧노래 부르며 현장으로 달려간 기억이 있다. 



세형동검



그날 내가 문화재청이 마련한 버스로 같이 움직였는지, 아니면 내 차를 몰아갔는지는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런 행사는 대체로 문화재청에서 미리 공지를 하고, 양떼보다 몰고 다니기 힘들다는 그 기자단은 대체로 7시 무렵 경복궁 안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출발하는 버스로 실어나른다. 


여담이나, 이런 자리에 꼭 늦게 나타나는 기자놈이 있기 마련인데, 이 놈은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다가 어디냐 연락하면, 꼭 자기 집이라 하면서, 기자단이 같이 움직이는 그 버스더러 자기 집앞으로 와서 태워가라 한다. 이놈은 버스만이 아니라 모든 약속 자리에서 버릇이 그렇다. 맨날맨날 늦게 나타나서는 뻘짓하기 일쑤고, 나타나서는 엉뚱한 소리만 해제낀다. 굳이 이 말을 하는 까닭은 이날인지, 이 즈음에도 또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발굴성과에 대해 당시 나는 관련 기사 두 건을 송고했으니, 아래와 같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를 되새김하는 기분으로 4주년을 맞아 새삼 들여다 본다.  


세형동검 7자루 넣은 2천200년 전 수장 무덤 발굴

충주서 돌무지나무널 무덤 발견, 청동기만 19점 수습

(2015.01.19 07:55:00) 


(충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신라와 백제, 가야가 본격 태동하기 직전 기원전 2~1세기 한반도에 집중 등장하는 목관묘가 충북 충주에서 발견되고, 그 중 한 무덤에서만 세형동검(細形銅劍) 7점을 포함한 각종 청동기 유물 19점이 쏟아졌다. 


매장문화재 전문 조사기관인 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강경숙)은 지난해 8월부터 충주시가 전국체전 개최를 위해 종합스포츠타운 건설을 추진 중인 호암동 628-5 일원을 발굴조사한 결과 구석기 유물포함층을 필두로 초기 철기시대(기원전 3세기~서력기원 전후) 무덤 3기와 통일신라∼조선시대 무덤 각종 무덤, 그리고 삼국시대 숯가마 2곳 등을 확인했다고 19일 밝혔다. 



청동끌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초기철기시대 무덤 3기는 땅을 파고 묘광(墓壙)을 만들어 목관을 안치한 것들로서, 그중 하나는 통나무 목관을 안치하고 그 주변으로 강돌을 덮은 돌무지나무널무덤(積石木棺墓)이고, 나머지 2기는 강돌은 쓰지 않고 목관만 쓴 나무널무덤(木棺墓)으로 드러났다. 


이중 돌무지나무널 무덤은 묘광을 상·하 2단으로 파내려가고는 그 바닥에 통나무관을 안치하고 목관 주변과 상부에다가 강돌로 채움한 것으로 조사됐다. 묘광은 평면 형태가 상단이 타원형, 하단은 장방형이었다. 규모를 보면 상단 광이 북동~남서 250㎝, 북서~남동 208㎝, 최대 깊이 25㎝이며 하단광은 길이(장축) 175㎝, 너비(단축) 82㎝, 깊이 175㎝다. 묘광 바닥에 안치한 목관은 대부분 부식됐지만 그 흔적으로 보면 길이 167㎝, 너비 73㎝, 잔존 높이 10∼13㎝였다.   



목곽묘




이 고분에서는 한반도 초기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중 하나로서 한국식동검, 혹은 좁은놋단검이라고 하는 단검인 세형동검(길이 23∼30㎝)만 7점이 출토됐는가 하면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이라 해서 가는줄무늬를 거미줄처럼 촘촘히 뒷면에 넣은 가는줄무늬청동거울 1점, 나무 자리를 끼우는 청동창인 청동투겁창 3점, 나무 자루를 묶어서 연결한 청동꺾창(銅戈) 1점, 청동도끼(銅斧) 1점, 청동새기개 4점, 청동끌(銅鑿) 2점이 쏟아졌다. 


그 외에 이 무덤에서는 검은색이 도는 흑도(黑陶)를 포함한 토기 2점과 칠기편 1점이 수습됐다. 칠기편 1점은 남은 상태가 극히 불량해 구체적인 양상 파악은 어렵지만 그 위치로 보아 묻힌 사람 얼굴을 가린 부채 자루였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조사단은 지적했다. 


유물은 발견된 지점으로 보아 목관 안과 바깥 부장품으로 각각 나뉘며, 목관 밖 부장품은 다시 묘광 내 돌무지 사이와 목관 상면으로 세분됐다. 흑도 1점과 청동도끼 1점, 청동새기개 4점, 청동끌 2점은 목관 밖에다 넣고 나머지는 목관 안에 두었다고 추정됐다. 토기 2점 중 1점은 목관 안에 넣었고 나머지 1점은 목관 상면에 두었다고 조사단은 판단했다.  



목관묘와 그에서 나온 강돌



청동거울을 무덤에 넣을 때 흔히 그런 것처럼 이번에도 일부러 깨뜨려 조각으로 넣은 이른바 파경(破鏡)으로 드러났다.  


조사단은 이 무덤을 만든 시기를 기원전 2∼1세기경으로 추정하면서 "당시 충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강력한 세력의 수장(首長) 묘로 판단한다"고 덧붙였다. 


현재까지 돌무지나무널무덤은 주로 전남이나 충남 지역에서 확인됐다. 


이처럼 많은 청동유물을 부장한 무덤은 사례가 극히 드문 데다 정식 발굴조사를 거친 것이 아니라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 신고된 사례가 대부분이어서 고분 구조 또한 파악이 힘들었다. 



청동새기개



하지만 이번 돌무지나무널무덤은 발견지가 충북이며 유적이 남은 상태가 극히 양호해 무덤의 축조방식과 유물 부장 방식을 명확히 알려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나아가 세형동검과 잔줄무늬거울 등 7종 19점에 달하는 청동유물은 수량과 종류에서 볼 때 단일 무덤 출토품으로는 국내 최대 수준에 속한다. 1971년 전남 화순군 대곡리에서는 이번에 출토된 것과 같은 세형동검, 잔줄무늬거울, 청동 새기개와 더불어 청동 방울 등이 함께 발견돼 1972년 국보 제143호로 일괄 지정된 바 있다. 따라서 이번 발굴 또한 이에 준하는 국보급 유물 발굴로 기록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이러한 발굴성과를 주목해 20일 오후 2시 일반인에게 발굴현장을 공개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무덤 조성에 사용한 강돌

                        



충주 발굴현장…통나무 목관 쓴 초기철기시대 지역수장

(2015-01-19 14:43)

사방 조망하는 곳에 묘자리·청동기 다량 부장


(충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전날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은 발굴현장은 온통 진흙이었다. 겨울바람이 거센 가운데 취재진과 취재차량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충주시가 전국체전 개최를 위해 종합스포츠타운 건설을 추진 중인 호암동 628-5 일원 발굴현장은 인근에 달천이라는 강이 흐르면서 형성한 충적지대가 드넓게 펼쳐졌다. 이런 곳에서 한국고고학계에서는 오랜만에 낭보를 들려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목관묘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강경숙)이 지난해부터 이곳을 발굴조사한 결과 기원전 3세기 이래 기원전후에 이르는 이른바 초기철기시대 무덤 3곳 중 1호 고분이라고 명명한 무덤 한 곳에서만 세형동검 7자루를 포함해 각종 청동기 19점이 쏟아진 것이다. 문제의 고분은 공사 예정지 전체 구역 중에서도 주변으로 사방을 조망하는 가장 높고 좋은 자리, 해발 101~102m 지점에 있다.


19일 문화재청이 주최한 발굴설명회에는 한국청동기 연구 권위자인 이청규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이번 발굴이 갖는 의미를 취재진에 설명했다.


그는 무엇보다 각종 청동기가 한꺼번에 무덤에 부장된 사실을 강조했다. 세형동검만 아니라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1점, 나무 자리를 끼우는 청동창인 청동투겁창 3점, 나무 자루를 묶어서 연결한 청동꺾창(銅戈) 1점, 청동도끼(銅斧) 1점, 청동새기개 4점, 청동끌(銅鑿) 2점이 나온 것이다.



눈밭을 헤치며



당시로서는 최고급 신소재 물품에다가 무기류가 대부분인 이런 유물을 다량으로 무덤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이 당시 이 지역 수장일 수밖에 없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이 무덤이 생긴 시기의 한반도는 신라·백제·가야가 등장하기 직전이다. 문헌기록을 보면 이 무렵 한반도 중남부에는 진국(辰國)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아마도 이 무덤 주인공은 진국을 구성한 소국(小國) 우두머리쯤 될 것이라는 추정이다.


나아가 이처럼 많은 초기철기시대 청동유물이 나온 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 대부분이 정식 발굴조사가 아니라 공사 중에 우연히 발굴된 것이라 이들 유물이 어떤 유적에서 어떤 맥락으로 나왔는지를 파악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충주 호암동 유적은 고고학계의 이런 오랜 궁금증을 풀어준 것이다. 이 교수는 이 점이 특히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기자단 브리핑



무덤 구조를 보면 2단으로 묘광(墓壙)을 깊이 파고 내려갔다. 이는 다른 지역 청동기를 출토하는 초기철기시대 최고 수장층 무덤과 비슷한 맥락을 이룬다. 이런 무덤구덩이를 보면 마치 동물을 잡기 위한 함정 비슷한 느낌을 준다.


조사 결과 2단 묘광 중 상단은 평면 형태가 타원형인 반면 아래쪽에 관을 안치하는 하단은 네 모서리 각을 죽인 말각형(抹角形) 장방형이었다. 조사단에 따르면 이처럼 2단으로 묘광을 굴착하는 초기철기시대 무덤으로는 화순 대곡리, 청주 가경동, 경주 조양동 5호묘 등지가 있다.


목관은 거의 다 부식한 까닭에 그것이 있던 흔적만 드러났다. 한데 그 모양을 보니 단면 U자형이었다. 통나무 한 면을 파서 그곳에 시신을 안치한 통나무 목관이 틀림없다는 것이 조사단 판단이다.



기자단 브리핑 중인 이청규 옹



이런 통나무 목관은 창원 다호리와 화순 대곡리, 김해 봉황동, 밀양 교동, 경주 조양동, 대구 팔달동, 성주 예산리, 안동 가곡리, 완주 갈동, 화성 발안, 안성 만정리, 용인 농서리 등지에서 현재까지 발굴을 통해 알려졌다. 이로써 보면 초기철기시대 통나무 목관은 한반도 중남부에서 고루 분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번 충주 호암동 무덤 목관 내부에서는 부채 자루일 가능성이 있는 칠기 흔적이 발견됐다. 조사단은 이것이 다른 지역 초기철기시대 무덤에서 확인된 얼굴 가리개용 부채일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부채는 창원 다호리 유적 1호 목관묘에서 처음 확인된 이래 성주 예산리 유적 40호분과 김해시 봉황동 431번지 유적, 그리고 경북 경산시 압량면 유적 94호 목관묘에서 발견되고, 최근에는 경주 탑동 21-3·4번지 소규모 단독주택 예정지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나아가 이번 발굴조사 결과 다뉴세문경은 역시 다른 지역 초기철기시대 무덤 출토 그것과 마찬가지로 일부러 깨서 무덤에 넣은 이른바 파경(破鏡)으로 드러났다.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인 순자는 죽은 자와 산 사람은 갈 길이 다르므로, 죽은 자를 위한 부장품은 일부러 깨뜨려 넣는다고 했다.



기념으로 한장 박아주고



동경뿐만 아니라 청동도끼도 두 동강을 내서 묘광의 각기 다른 부위에 넣은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이번 발굴성과는 여러모로 화순 대곡리 유적 발굴성과와 대비된다. 통나무 목관을 쓴 대곡리는 세형동검 5점을 포함한 청동기 출토품이 15점이다. 다만, 대곡리에서는 아마도 종교의식에 사용했을 법한 청동방울이 있지만, 이번 호암동 유적에서는 그런 유물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실생활에 사용했을 리는 없고 명기明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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