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이상국집을 읽다가>
이규보가 요즘 태어났다면 온수매트나 에어컨을 쓰지 않고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지냈을까?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왜, 저 유명한 <토실을 허문 이야기壞土室說>가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1에 있지 않던가.
10월 초하루에 이자李子(이규보 본인)가 밖에서 돌아오니, 아이들이 흙을 파서 집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무덤과 같았다. 이자는 뭔지 모르는 체하며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집안에다 무덤을 만들었느냐?”
하니, 아이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무덤이 아니라 토실土室입니다.”
하기에,
“어째서 이런 것을 만들었느냐?”
하였더니,
“겨울에 화초나 과일을 저장하기에 좋고, 또 길쌈하는 부인들에게 편리하니, 아무리 추울 때라도 온화한 봄날씨와 같아서 손이 얼어터지지 않으므로 참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고려시대 관료계층의 사람들이 집집마다 일종의 온실을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땅을 우묵하게 파고 그 위에 둥근 지붕을 얹은 모습이라 무덤같다고 했던 모양으로, 베틀을 설치하고 여인이 들어가 길쌈을 할 수 있었다니 그 크기도 제법 컸다.
이름은 '토실'이지만 뒤에서 언급하듯 나무도 꽤 사용해서 지었던듯 하다.
그냥 땅 파고 들어앉는다고 '온화한 봄날씨' 같진 않았을 테니 화덕이나 구들 같은 난방시설도 있지 않았을까?
음력 10월 초라면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질 무렵이니 시기도 적절하다. 아마 이규보의 하인들은 칭찬을 들을 줄 알았으리라.
여기까지만 했다면 훈훈한 이야기로 그쳤겠지만, 우리의 이규보 아저씨는 화를 내고 말았다. 그 이유인즉슨...
1)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추운 것은 사계절의 정상적인 이치이니, 만일 이와 반대가 된다면 곧 괴이한 것이다. 옛적 성인께서 겨울에는 털옷을 입고 여름에는 베옷을 입도록 마련하였으니, 그만한 준비가 있으면 족할 것인데, 다시 토실을 만들어서 추위를 더위로 바꿔 놓는다면 이는 하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2) 사람은 뱀이나 두꺼비가 아닌데, 겨울에 굴 속에 엎드려 있는 것은 너무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3) 길쌈이란 할 시기가 있는 것인데, 하필 겨울에 할 것이냐?
4) 또 봄에 꽃이 피었다가 겨울에 시드는 것은 초목의 정상적인 성질인데, 만일 이와 반대가 된다면 이것은 괴이한 물건이다. 괴이한 물건을 길러서 때아닌 구경거리를 삼는다는 것은 하늘의 권한을 빼앗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내가 하고 싶은 뜻이 아니다.
이규보는 이 네 가지 이유를 대며 "빨리 헐어버리지 않는다면 너희를 용서없이 때리겠다."고 하인들을 닦달한다. 그리고 토실을 허물고서야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사실 이규보가 늘어놓는 이유란 것이 과학정신으로 무장된 현대인이 보기엔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꼰대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이규보가 13세기 고려 사람이란 걸 까먹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그러했던 걸.
뛰어난 기술보담도 중요한 건 그걸 받아들여 쓰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역사를 보면 그런 사례가 부지기수다. 예컨대 19세기 말, 중체서용이니 동도서기니 하며 유럽과 미국의 기술을 수용하고자 했던 움직임이 결국 슬픈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 Editor's Note ***
이것만으로는 이규보가 말하는 토실이 온실 수준인가는 확정하기 어렵다.
저런 토실은 실은 얼마전까지도 한국사회 특히 농촌에는 광범위했다.
겨울에 화초나 과일을 저장하기에 좋고, 또 길쌈하는 부인들에게 편리하니, 아무리 추울 때라도 온화한 봄날씨와 같아서 손이 얼어터지지 않으므로 참 좋습니다는 논급은 이렇다 할 난방 장치를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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