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심인가 아첨인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만들어 18세기 제주 사회를 우리에게 보여준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1653~1733), 그는 얼마 안 되는 임기 동안 제주에 크나큰 발자취를 남겼다.
절과 신당을 때려부수고 심방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한 일은 제주 노인들에게 '영천 이목사' '영찰목사'가 지금껏 회자되게 만들었다.
그런 그가 제주에서 행한 일 중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다. <숙종실록> 권38, 숙종 29년(1703) 5월 20일자 기사를 보면....
처음에 제주 목사 이형상이 치계馳啓하기를,
"본도本島의 오미자五味子는 세상에서 뛰어난 맛이 있다고 일컬어서 어공御供에 합당하므로 분의(分義, 의리)로 보아 숨겨 둘 수 없기에, 먼저 다섯 말을 주원(廚院, 왕실 부엌)에 올리고, 명년부터 진헌進獻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으므로 사옹원司饔院에서 복품覆稟하니, 임금이 특명으로 봉진封進하지 말게 하였었다.
제주 오미자는 예부터 알이 크고 맛나기로 유명했다. 김정(金淨, 1486~1521)의 <제주풍토록>에도 특별히 기록되었을 정도다.
이형상 목사는 이를 다섯 말이나 바치면서 아예 정식 공물로 만들기를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조판서 김진귀(金鎭龜, 1651~1704)의 의견에 따라 종중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김진귀도 제주와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집권한 남인 정권이 서인인 그를 제주에 위리안치했던 것이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고서야 그의 유배가 풀렸다).
이형상의 오미자 진상 건을 두고 사관史官(서인이었을듯)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살피건대, 신하가 사사로이 바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인데, 이형상은 예전 시골 사람이 미나리를 왕에게 바치는 정성을 핑계하여 자하子瑕가 먹던 복숭아를 임금에게 바치는 꾀를 본받으려고 하였으니, 그 정태情態가 미워할 만하다.
마땅히 엄한 말로 처벌하여 물리쳐서 신하가 충성을 자랑하여 총애를 구하는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니, 문비問備의 벌罰이 어찌 족히 징계가 되겠는가?
그러나 봉진하지 말기를 명한 것은 성덕聖德에 빛남이 있고, 또한 그 마음을 부끄럽게 할 만하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만약 이형상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다면 제주 백성의 시름이 한 겹 더해졌을 뻔 했다.
*** Editor's Note ***
이런 이형상이 정조 20년, 1790년 청백리에 올랐으며 영천 성남서원에 배향되었다.
오미자 진상 건 탄핵 역시 당쟁의 소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기존에 바치지 않던 물건을 지방관이 섣불리 바쳤다가 아첨한다 해서 탄핵받는 일이 드물지 않다.
왕이라고 해서 덮썩 받으려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아 저런 식으로 아첨한다는 탄핵이 들어오면 저리 반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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