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를 '예보'한다는 것은 예부터 고난도 작업이었으며 또 권력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천문을 읽고 기상을 관측하는 임무는 권력자의 지근거리에서 행해졌다.
조선만 하더라도 천문, 지리, 측후 등을 관할하던 관상감은 영의정이 명목상 최고 책임자일 정도로 격이 매우 높은 관청이었다.
근대가 되었어도 날씨 예보는 중요한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근대가 되었기에 날씨를 미리 알고 알려주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고 해야 맞겠다.
대한제국은 1907년 인천에 '중앙관측소'를, 지금의 종로 송월동 서울기상관측소(국립기상박물관) 자리에 '한성측후소'를 두고 이를 비롯한 전국 8곳에 '측후소'를 두어 한국의 날씨를 파악하게 하였다.
강점 이후 조선총독부도 이를 이어받았고, 각 도에 측후소를 이관했다가 다시 회수하는 등 부침을 겪었지만 대체로 총독부 직속기관으로 유지했다.
1939년 조선총독부관측소가 '조선총독부기상대'로 이름을 바꾸고, 해방 후 이것이 '국립중앙관상대'가 되는데 바로 오늘날 기상청의 전신이다.
그 조선총독부관측소 초대 소장이 와다 유지 和田雄治 (1859-1918)라는 사람이었다. 도쿄대 물리학과를 나와서 일본 기상사업을 관할하고 해류 조사, 기상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받는 인물인데, 엉뚱하게도 한국 문화재 쪽에서 꽤 언급되곤 한다.
예컨대 지금 국립춘천박물관에 있는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은 1965년까지만 해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있었다.
한일협정 당시 약탈문화재로 인정받아 겨우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를 1912년 강릉에서 반출해 도쿄제실박물관(도쿄국립박물관 전신)에 기증한 이가 와다 유지였다.
이것 말고도 공주 충청감영에 있던 금영측우기(국보)를 1915년 일본에 반출했던 것도 와다 유지였다고 한다.
측우기 건은 기상학자로서 학문적 관심이 일으킨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글쎄.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을 일본에 보내던 해인 1912년(메이지 45) 새해, 조선총독부관측소 소장이던 와다가 일본 도쿄 우에노박물관(=도쿄제실박물관) 역사부(100년도 더 전 일본 박물관에 이미 있었다!)에 근무하던 아무개에게 새해맞이 엽서를 보냈다.
워낙 보낼 데가 많았던지 받는 분 직함과 성명만 직접 쓰고 자기 주소는 고무인으로 찍었다. 글씨가 친필인지는 모르겠는데 급하게 썼는지 좀 날렸다.
그런데 내 흥미를 끄는 것은 그 뒷면이다. <풍운기>라고 조선시대 관상감에서 매일매일 기상을 살핀 기록의 한 면(1748년 음 10월 16일)을 찍어 엽서로 만든게 아닌가 말이다.
아마 이날은 햇무리가 이색적으로 졌던지 그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가며 설명했는데, 와다도 그에 흥미를 느끼고 사진을 찍어놨던 게 아닐까.
이 <풍운기>도 와다가 1911년 옛 대한제국 학부 창고에서 찾아내 일본 학계에 보고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행방이 묘연하다고도 하고,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있다고도 한다.
어딘가에 있다면 좀 구경해보고 싶은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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