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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파고 보니 우람한 예산 가야사지, 문제는 사후처리!

by taeshik.kim 2021.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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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 예산 가야사지라는 곳을 올들어 다시 발굴한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했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이런저런 데서 그 발굴성과라 해서 관련 소식이 간헐로 들려오기에

적어도 그 발굴에 관한 한 철저한 甲의 위치에서 조사단 선정해 조사비 농가주며, 이리해라 저리해라 감내놔라 배내놔라 하는 충청남도 예산군청 학예연구사 이강열한테 기별을 넣으면서 이르기를

화질 좋은 관련 사진들과 조사단이 정리한 올해 발굴 약식보고서 부탁하오

하매, 올해 까디빈 성과라며 틱! 하니 저런 사진 서너장을 카톡에 첨부하고는 암말이 없다!

뭐 하도 바쁘신 몸이라 그런갑다 하면서 대뜸 내가 답장하기를

"강열아! 너 X됐다. 저걸 우짤라카노? 니 묘수 있나?"

했으니, 실상 절반은 놀림이었으니, 저가 무슨 용빼는 재주있다고 저걸 어찌할 방도를 찾았겠는가?

딱 보니 산이 평지로 흘러내리는 그 끄터머리를 툭 잘라 깎아내고 돌로 쌓고 해서 길쭉한 네모꼴로 평탄대지를 만든 다음 그 우에다가 각종 사찰 관련 시설들을 세웠던 흔적이 완연하니

공중에서 드론으로 내려다본 모습은 무슨 성채 같아서, 저와 매우 흡사한 몰골로 근자 조사한 고고학 흔적으로는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가 있으니

그러고 보니 이짝도 지금은 나 이제 공무원 그만할끼다 하고는 냉큼 대학에 자리나자마자 튄 윤성호가 광진구청 학예사로 근무할 적에 기획한 곳도 그러하니

두 곳 모두 산상 유적이라는 점에서 상통하거니와, 문제는 파긴 팠다! 까고 보니 공중에서 보니 경관은 지긴다!

문제는 그 다음이라 저걸 이젠 우찌할 것인가가 문제라, 홍련봉 보루만 해도 오죽 그 활용이며 보존방식을 둘러싼 논란을 거듭했던가?

그 꼴을 예산 강열이도 그대로 밟아야 한다니 내 그 신세 동정하노라.


위 사진이 우리한테 익숙한 그 동서남북 방향으로 내려찍은 발굴현장이거니와, 간단히 말해 위쪽이 북쪽, 아래쪽이 남쪽, 오른쪽이 동쪽, 그 반대편 사각모로 뼁끼칠 비스무리하게 흰색 선을 그어놓은 데가 서쪽이라

올해 제8차 시발굴 조사를 벌인 동방문화재연구원에 의하면, 저 노출한 현 상태를 기준으로 볼짝시면, 전체 긴네모꼴 구역 전체 석축은 이곳에 가야사라는 절이 처음 들어설 적 고려시대에 쌓은 것이며, 그 왼편 줄고래가 보이는 데가 볼짝없이 조선시대 흔적이라, 문제는 그 반대편 오른쪽 동쪽 한복판을 차지하는 봉긋한 단추 대가리 같은 저 시설이니

저것이 그 유명한 오페르트 도굴사건 주인공이신 남연군 묘가 되시겠다. 흥선대원권 이하응 아버지요, 고종의 할아버지 남연군 무덤이 저곳이다.

조승우가 주연한 풍수쟁이 영화 명당인가에서 이런 곳에다가 조상 무덤을 쓰면 그 후손이 왕이 된다 해서 불싸지른 그 자리 무대가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 되겠다.

구체하는 발굴성과는 추후 다른 자리를 빌려 정리하기로 하고, 암튼 하필 남연군 묘가 자리잡은 데가 가야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라

가야사라는 멀쩡한 절을 불태우고 때려부수고 그 자리에 묘를 썼는지, 아니면 석탑을 비롯한 절 흔적만 남은 빈공간에다가 무덤을 썼는지는 확실치 아니해서

다만 하나 확실한 점은 멀쩡한 절이 있었건, 혹은 그 흔적만 남은 자리건 상관없이 남연군 묘를 저 자리다 쓰면서 적지 않은 유적 파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발굴조사 결과로도 증명되었거니와, 그러고 보면 저리 평탄대지가 조성된 곳에 무덤을 쓰기는 참말로 좋았겠다 하는 생각은 해 본다.


이걸 보면 남연군 묘역 전면에는 성벽 같은 둔덕 경계가 있음을 본다. 저건 아마도 남연군 묘를 만들면서 그 뒤쪽 경계지점을 표시한 징표 아닌가 하는데, 이 사진을 기준으로 보면 사진을 찍은 지점이 무덤 앞쪽이 되겠다.

저 무덤 구역을 포함한 전체 이 유적 사적은 긴네모꼴 석축이 확인되거니와, 저걸 고려시대에 쌓았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본다.


보면 참 잘 쌓았다. 그리고 잘 남았다.

문제는 지금부터...저걸 우찌할 것인가다. 강열이 고민은 바로 이에서 유발한다.

남연군 묘를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하필 그 자리가 금당 혹은 석탑이 있던 자리로 간주되거니와

저걸 보고 대뜸 나는 "강열아! 철근콘크리트로 비름빡 발라라!" 했거니와

농담 아니라 나는 왜 문화재 현장에 현대의 그 좋은 철근콘크리트를 쓰지 않는지 언제나 불만이거니와, 그렇다고 무턱대고 시멘트로 쳐바르라는 뜻이 아니라, 그걸 이용하면 얼마든지 갓 노출한 저런 고려시대 흔적을 붕괴를 방지하면서 현장을 그대로 노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거니와

더 웃긴 건 강열이도 저 비스무리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런 생각 혹은 아이디어가 근엄하기 짝이 없는 우리네 문화재위원들 혹은 문화재청에 콱 막히고 말았다는 것이어니와
묻거니와 왜 문화재현장에 철근콘크리트는 안 되는가? 쓰자!

대략 살피니 큰 조사는 끝난 게 아닌가 했지만, 조사할 대상이 많이 남았다 하거니와

如컨대 조선시대 줄고래가 출현한 저 건물터 아래는 분명 고려시대 흔적이 나올 터지만, 저걸 걷어내느냐 아니냐 하는 논란도 없지 않은 듯하고 무엇보다 정작 절이라면 가장 중요한 금당 혹은 탑 자리를 파지 못하니 환장할 노릇 아니겠는가?

파서 보기는 좋지만, 문제는 그 파서 보기 좋은 것을 어찌 보여줄 것인가 하는 난관이 기다리는 것이다.

다시 강열이를 놀렸다.

"강열아! 왜 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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