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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페르시아문화 탐방> ①소금광산서 찾은 1700년전 '소금인간'(2008)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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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4~11일, 나는 한양대 문화재연구소(당시 소장 배기동)가 기획한 이란 지역 페르시아 문화 탐방단 일원에 포함되어 현장을 탐방했다. 당시 나는 그 탐방을 4회에 걸친 시리즈 기사로 송고했거니와, 훌쩍 10년이 더 흐른 지금, 현지 사정 역시 많이 달라졌겠지만, 나름 의미는 없지 않다 생각해 재방한다. 


당시 지면 관계로 본문과 관련한 도판을 제대로 첨부하지 못했거니와, 11년이 흐른 지금, 당시 촬영 사진들을 보강한다. 


다시 말해 이 기고문은 11년 만의 개정판인 셈이다. 



2008.02.24 08:05:01


<페르시아문화 탐방> ①소금광산서 찾은 1700년전 '소금인간'

소금광산서 찾은 1700년전 '소금인간'

이란 국립박물관 전시품 수백점 불과하나 인류문명 태동 증언


<※편집자주 = 이란 북서부 길란 지역에서 이란과 구석기 유적 공동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는 한양대 문화재연구소(소장 배기동)는 이란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4일부터 11일까지 테헤란을 중심으로 시라즈-야즈드-이스파한을 거쳐 카스피해 남쪽 연안 도시 라시트를 경유하는 페르시아 문화탐방을 실시했다. 40여 명으로 구성된 이번 탐방단에 동행한 견문을 4회에 걸쳐 정리한다.> 



페르도시 호텔에서 바라본 테헤란 시내



(테헤란=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열사(熱砂)의 나라에 파카는 웬말이며, 부디 지뢰밭에는 근처도 얼씬거리지 말라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말을 뒤로 하면서 인천공항을 출발해 9시간만에 테헤란 호메이니공항에 내리니 한밤중이었다. 이란은 열사의 나라도 아니며 위도가 비슷해서인지, 아니면 평균 고도가 1천m가 넘는 고원지대여서인지는 몰라도 기온은 서울과 비슷하다. 일주일 뒤 다시 호메이니공항을 통해 떠날 때까지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7.5배나  넓다는 광대한 이란 국토 남북을 종단했음에도 적어도 우리가 다닌 길 어디에도 지뢰밭은 없었다. 


전날 현지에 도착해 탐방단을 맞은 배기동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숙소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온 도시를 환하게 밝힌 불빛들을 가리키면서 "내가 어제 이란 외교부 장관에게 얘기해 저렇게 불빛을 밝히도록 했다"고 농담을 했다. 요즘 테헤란의 밤이 저렇게 밝은 까닭은 호메이니가 주도한 팔레비 친미정부 전복 혁명 30주년 기념일이 가까워 오기 때문이란다. 



테헤란 이란국립박물관 입구



페르도시 호텔이란 곳에서 이란에서의 첫날밤을 보낸 탐방단은 이튿날 오전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이란 국립박물관을 찾았다. 가는 길 왼편에 담장이 우람한 이란 외교부 청사를 지난다. 경비는 그다지 삼엄하지 않으나, 이 부근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된다고 한다. 한양대측에 의하면 아직까지 외부세계에 공개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어 이런 전통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란 국립박물관은 1937년 프랑스 건축가 앙드레 고다르가 사산조 페르시아 양식 건축물을 모델로 만든 본관에다가 1996년에 고고학 전문 박물관이 신관으로 추가 개관됐지만, 아무 생각없이 전시실을 빙 둘러보기만 한다면 5분이면 관람로 출발지점으로 도로 돌아온다. 전시실은 평면 ⊃자 모양이며, 그나마 1층만 있을 뿐이다. 



이란국립박물관 입구



그럼에도 눈대중으로 몇 백점에 지나지 않을 전시품 하나하나는 인류문명의 시작을 증언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대표급이다. 하기야 이란은 인근 메소포타미아지역과 더불어 인류문명이 가장 일찍 태동한 곳이 아닌가? 한반도가 여전히 신석기시대에 머물며 도구라고 해 봐야 돌을 다듬어 쓰면서 금속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그 시절에 이곳에서는 이미 함무라비왕이 군림하면서 광개토왕비 같은 장대한 비문을 남기기도 했다. 


고고학 출토 유물 일색인 전시품은 선사시대 이후 역사시대를 내려오는 이른바 편년체식 진열기법을 쓴다. 다만 전시공간이 부족한 데 따른 고육책인지 역사시대는 우리로 치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창 병립하는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로 끝난다. 



이란국립박물관 선사실



우리 박물관 같으면 으레 그 도입부에 주먹도끼를 비롯한 구석기 유물을 배치하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서 그렇게 익숙한 석기유물은 단 1점도 만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신 전시실 첫 머리는 원색으로 겉면을 장식한 각종 채도(彩陶) 차지가 되어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구석기 고고학자인 배기동 교수는 이런 의문을 풀어준다. "이란에는 구석기시대를 전공하는 고고학자가 없습니다." 



이란국립박물관 석기 코너



인류문명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한다는 이란에 구석기 전공자가 없다니 선뜻 믿기 어렵다. 하지만 이는 이란 고고학이 처한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구석기 유적을 발판으로 삼은 한국 고고학의 이란 진출은 의미가 더욱 클 것이다. 


상설 전시품을 일별하면 그 출토지는 대체로 이란 중부에 자리한 아케마메니아 왕조(페르시아 제국) 유적지인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와 페르시아만과 비교적 가까우며 선사시대 이래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중심지 구실을 한 '수사'(Susa) 등 두 곳에 집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이란 테페(Jeiran Tepe) 유적 출토 기원전 1천년기 삼족사발



전시 토기를 훑어보던 조유전 토지박물관장이 갑자기 "여기 백제 삼족기(三足器)가 있네"라고 해서, 그가 가리키는 토기를 살펴보니 영락없이 발 세 개가 달린 토기인 삼족기다. 영어 안내문을 보니 이 토기는 제이란 테페(Jeiran Tepe)라는 유적의 출토품이며 제작 연대는 기원전 1천년대라고 한다. 


한반도에서 선사시대 때 석기 제작에 널리 사용된 흑요석이란 돌은 이곳의 선사시대에도 그 재료로 널리 사용된 듯, 그 원석이라 할 만한 새까만 돌이 조명을 받아 더욱 빛을 낸다. 한데 그 크기가 자그마치 어린아이 머리만 했다. 우리의 도장 혹은 봉니(封泥)에 해당하는 인장은 이곳에서는 기원전 3천년대에 사용되다가 폐기된 '수사' 유적 출토품으로 여러 점이 전시됐다. 인장 바닥에는 문자가 아니라 동물이나 기하학 문양이 새겨져 있다. 



Susa 출토 기원전 3세기 인장

Susa 출토 기원전 3세기 인장



기원전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기 문양 중에는 十자 도안이 더러 발견되는 점도 주목거리였다. 결국 이런 전통은 나중에 기독교가 흡수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Susa 출토 기원전 4세기 초반 十자 무늬 도안 사발



전시실 중간에서는 어른 키만한 흙으로 빚은 황소상이 기다린다. 무엇에 근거를 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설명문에 의하면 그 제작 시기는 기원전 1250년이라고 한다. 이를 지나면 시커먼 원추형 돌기둥이 관람객을 가로막는데 그 유명한 함무라비왕의 법령을 새긴 비다. 하지만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 원본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있고, 이 비문은 복제품이다. 



이란국립박물관 함무라비비 복제비

이란국립박물관 함무라비비 복제비



안내문을 보니 실제 비는 1901년 '수사'에서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더 모르강이 발견한 직후 그 판독과 복원처리를 위해 루르브로 이송되었으나 얼마 뒤 프랑스 정부는 원본을 놔 두고, 이 복제품만 덜렁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담은 설명문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비의 원본을 언젠가는 돌려받아야 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복제품에도 이런 아픈 역사가 새겨 있다. 



이란국립박물관 함무라비비 복제비 영문 안내판



그 안내문은 나아가 애초 비는 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인 바빌론에 기원전 1800년 무렵에 세워졌다가 기원전 1160년경 '수사'로 옮겼다고 한다. 우리의 제액(題額)에 해당되는 비문 꼭대기에는 태양신 사마시를 숭배하는 모습을 새겨놓았으며, 비 몸통에 쐐기문자(설형문자)를 새겼는데 줄과 행을 반듯이 긋고 그 안에다 글자를 촘촘히 새겨 넣었다. 



이란국립박물관 함무라비비 복제비

이란국립박물관 함무라비비 복제비 세부



기원전 716년에 세웠다는 사르곤 2세의 기념비는 함무라비왕 비문 옆에 전시 중이다. 글씨는 탁본없이는 그 흔적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마멸 상태가 심각하다. 페르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연 다리우스 1세, 혹은 그 뒤를 이은 제왕 크세르크세스가 중국역사의 표현을 그대로 빌린다면 봉건제후국의 알현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조 작품도 볼 만하다. 



기원전 716년 세운 사르곤 2세 기념비



이 외에도 이란 역사의 자부심 원천이라고 할 만한 페르시아 제국, 혹은 다리우스 1세와 관련된 다른 유물로는 머리가 잘려 나간 그의 동상도 있다. 이 조각은 원래 이집트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며 1972년 프랑스 고고학 팀이 '수사'에서 발굴했다고 한다. 



머리잘린 다리우스 1세 상.


다리우스 1세 상 받침대




테헤란 국립박물관 관람 대미는 '소금인간'이 장식한다. 덥수룩한 백발과 그만큼이나 무성한 수염이 그대로 붙은 이 소금인간은 머리는 따로 분리해 유리용기에 넣어 전시 중이며, 그 주변에는 이 유골과 함께 발견된 다양한 유물을 배치했다. 유물로는 가죽신과 쇠칼 3자루, 모직물로 짠 반바지, 은으로 만든 바늘 혹은 귀 후비개, 멜빵, 가죽끈 일부, 숫돌, 호두 등이 있다. 



소금인간

소금인간



발견 당시 가죽신발 안에는 이 유골 주인공의 발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발뼈는 머리와 함께 전시가 이뤄지고 있다. 


세계 고고학계에서 이를 소금인간이라 부르는 까닭은 발견된 곳이 바로 소금광산 갱도 안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시 중인 인골은 안내문에 의하면 1993년 겨울, 잔잔 주(州) 주도인 잔잔의 서쪽 마을 함젤루 의 남쪽에 위치한 체흐라바드 소금광산에서 소금을 캐던 광부가 갱도 깊이 45m 지점에서 발견했다. 



소금인간의 착용물과 도구

소금인간이 착장한 바지 혹은 장화



뼈 조각과 직물을 시료로 실시한 탄소연대 측정결과, 이 소금인간이 산 시대는 대략 1천700년 전 사산조 페르시아 시기라 한다. 머리카락 분석결과 이 남자는 혈액형이 Rh+ B형. 다른 의학적 분석결과에 의하면 죽을 때 나이는 37세, 신장은 175㎝였다. 3차원 스캔 결과 사망하기 직전 눈 부위에 둔탁한 가격이 있었다는 결과도 나왔다.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왼쪽 귀에 황금 귀걸이를 한 점으로 보아 이 사람은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하지만 광부도 아닌 이런 고귀한 신분의 남자가 왜 소금광산에 버려졌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 소금광산에서는 지난해에 이르기까지 모두 5구에 이르는 소금인간이 추가로 발견됐다. 한국고고학계에서는 조선시대 분묘에서 잇따른 미라 발굴로 개가를 올리고 있는데, 이곳 이란에서는 소금인간이 연이어 출현해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taeshik@yna.co.kr

(끝)  



기원전 1천년대 후반기 철제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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