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변 사건 (산송 사건)이 있어서 내가 30명을 모아서 청양 납산동의 금장 (산송 때문에 문제가 생긴 구역) 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옛 금정역의 역한(驛漢) 최한석으로 하여금 수표를 작성하여 이름을 쓰고 서명하게 한 다음 묘를 파가게 하였다.
아침에 청양향교가 있는 마을 앞에 이르니 그 역한이 모집한 백여 명과 고을 종들이 길가에 매복해 있다가 나와서
신분을 막론하고 사람을 때려 결박하고 의관의 주머니 속에 있는 수표를 빼앗았다.
이 일로 인해 어떤 사람은 어깨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어떤 사람은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처럼 윗사람을 범하고 분수를 넘어선 변고는 보지 못했다.
이 포옹일기를 쓴 최진익은 한미하지만 어쨌건 양반 후손이고,
산송이 일어난 상대는 역졸인 최한석이다.
역졸집에서 최진익 집안 무덤 구역에 묘를 써서 산송이 일어난 것이다.
무덤을 파가게 하려고 당사자를 불러 확인서에 서명까지 하게 하였는데,
백여 명이 나중에 몰려와 최진익 집안 사람들을 패고 크게 충돌하였던 것이다.
역졸이라면 호적에서는 신분은 낮지만 어쨌건 평민인데,
이 사람을 "옛 금정역의 역한"이라고 적어 놓은 것을 보면,
최근 호적에서는 신분 직역이 상승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쉽게 말해 이 사람은 최근의 식년 호적에는 양반직역을 받아 놓은 사람이 아니라고 장담 못한다는 뜻이다.
1842년이면 이미 당시 호적을 보면 한 집 건너 한 집이 유학幼學이던 시대다.
경복궁 중건이 바꾸어 버린 조선의 모든 것, 그것을 증언하는 포옹일기 1861년 1월의 토로
경복궁 중건이 바꾸어 버린 조선의 모든 것, 그것을 증언하는 포옹일기 1861년 1월의 토로
대원군 이하응이 국정에 관여하며 경복궁을 중검하고 종친보를 만들었다. 부유한 사람과 상민은 특별한 공로나 글재주가 없어도 손쉽게 관작을 받았다. 반면 가난한 사람과 대대로 양반으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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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9세기 중반이 되면 조폭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본다. 저 사건 해결을 위해 각각 동원한 조직폭력배가 30명, 백 명이었던 것이다.
상대가 백 명을 동원했다 했지만 이 규모는 과장되었을 것이다. 그래야 덜 쪽팔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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