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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

산송이 왜 이렇게 많았을까?

by 신동훈 識 2026.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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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완공한 조선은행 본관. 지금의 옛 한국은행 본관이다. 지금은 조폐박물관으로 쓴다.

 
우리나라 조선 후기에 산송이 많았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살인사건의 검시 자료에서도 

산송 때문에 살인까지 가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리고 조선 후기 근대적 측량이 제대로 확립되기 전이니, 

선산이라 해도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나 내 산인지도 알 수 없고, 

투장도 반드시 양반이 낮은 계급 사람들에게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낮은 계급 사람이 높은 계급의 사람 산소에 투장하고는 걸리면 배째라 한다. 

조선후기, 산송이 이렇게 급증한 이유도 한 번쯤 살펴볼 만하다. 

산송이 많았다는 팩트 이상의 사실을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 [편집자주] ***
 
저 산송을 근간에서 흔들어 버린 것이 바로 토지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이다. 

저 사업은 인구센서스와 더불어 근대 국가를 추동한 양대 축이라, 저 조사사업들은 그 이전 빗금으로 존재하던 경계를 선으로 바꾸어버렸다. 

물론 그렇다 해서 저 사업이 끝나고 나서 저 경계를 둘러싼 다툼이 아주 없어졌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고, 나아가 그 측량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불협화음이 일었지만, 저 산송시대와 토지조사사업 이후의 그것이 같을 수는 없다!

빗금을 없애버리고 선으로 그어버린 데서 무슨 경계 다툼 영역 다툼이 있겠는가? 

그 점에서 토지조사사업은 단군조선 이래 한국사 근간을 바꾼 사건이다. 

토지와 인구를 측량하지 아니하고서 무슨 근대 국가가 성립한단 말인가?

이런 말마다 항용 따라 나오는 말....

그래서 넌 일제가 잘했다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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