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단장께서 앞서 쓰신 바 고고과학적 측면에서 폭력의 증거에 대해 조금 써본다.
사실 사람 사는 곳은 다 마찬가지라 과거라고해서 왜 주먹질이 없었겠으며
지나치게 나가면 흉기를 휘두르는 사람이 왜 었겠는가.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긴 한데, 이러한 폭력의 증거가 체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가가
어떤 정치적 권력의 출현의 증거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 같다.
필자가 조사한 바 있는 인더스 문명도
앞서 한번 쓴것 같지만 이러한 체계적 구조적 폭력의 증거가 많지 않다는 점이
왕릉이라던가 빈부차가 도시 유적안에서 많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함께
현지의 연구자들을 가장 곤란하게 만드는 사실의 하나였다고 기억한다.
필자가 기억하는 바 이러한 구조적 폭력이 가장 처절하게 나타나는 시기의 유적 중 하나가
일본의 중세유적이다.
일본은 고대시기나 에도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이런 인골들이 많지는 않은데
중세 유적, 특히 무가정권의 동란이 있었던 무렵의 유적에서는 전쟁의 상흔이 여실한 인골들이 정말 많이 나온다.
대표적인것이 가마쿠라 막부가 있었던 가마쿠라시에서 발견된 인골로서
이 인골은 아마도 동란 후 전쟁에서 패한 이들을 깡그리 구덩이 속에 묻어버렸던 모양으로
인골에서는 칼질한 흔적, 전쟁의 상흔이 여실히 나왔다.
한국은 어떨까?
한국은 필자가 아는 한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임진왜란 당시 유적 등)
이러한 폭력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인골이 흔하지는 않은 편이다.
물론 부상의 흔적이 있는 인골도 있긴 한데
구조적 폭력의 흔적이 많지 않다.
필자가 조선시대 인골을 조사해 본 결과로는 부상 흔적도 많지 않았고
아주 예외적으로 칼질 당한 흔적이 있는 뼈를 조사한 적이 있는 정도였다.
조선시대 사회의 안정성이나 평온함을 상징한다고 해도 좋겠고,
일본 무가정권을 유지한 힘은 기본적으로 군사적 폭력이었다는 점을 상기하게 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구조적 폭력의 흔적이 난무하는 일본도 중세를 넘어 에도시대로 들어가면
매우 평온한 시대가 되고 이때가 되면 구조적 폭력의 흔적도 많이 줄어드는 것으로 안다.
*** [편집자주] ***
국내 발굴현장에서 이에 대한 탐구는 아래가 거의 유일하다.
신라말 대규모 학살 흔적, 이 엄청난 소식을 깔아뭉갠 국가유산청
https://historylibrary.net/entry/%E3%85%87-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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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고, 찔리고' 진주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사람 뼈 정체는? '베이고, 찔리고' 진주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사람 뼈 정체는?[학술이 술술]은 우리 지역에서 나오거나, 지역을 다룬 학술 논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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