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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필사, 활자, 목판 이야기를 마무리 하며

by 초야잠필 2025.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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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깊이 알지 못하면서 굳이 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이렇다. 

우리나라 필사, 활자, 목판에 대해서는 

단순히 그 책이 이 중 어느 것에 해당하는가를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그책이 하필 그런 형태로 나왔는가 

이것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리는 활자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서구 인쇄사로 보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우리나라 금속활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만들었지만
서양처럼 인쇄혁명까지 이르지 못했다.

대량생산까지 가지 못했다. 

이것은 서양 인쇄술에서 파생한 기름짜는 프레스를 쓰지 않아서 그렇다 등등의 주장이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서양 인쇄사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이고,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책 제작이라는 전체 구조물 안에서 

인쇄본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상황에서 쓰였는가를 한 번 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라 본다. 

필자가 보기엔 활자본이 쓰이는 사회경제적 조건이 있었다. 

이는 필사본이나 목판과는 상당히 다른 전제조건이 있었다고 보는데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상황에서만 활자본이 쓰였던 것으로, 

이 조건이 상당히 장기간 지속되었던 것이 

우리나라에서 활자인쇄 문화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일찍,

그리고 장기간 활발히 이용되었던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활자본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기능했다는 것이고, 

그 효율성 때문에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이를 버리지 않은 것이지

결코 활자본이 갖는 문화적 성취 때문에 이를 질질 끌고 간 것이 당연히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목판본의 경우는
필자나 김 단장께서도 썼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목판본은 단순히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만 파고 찍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목판본은 거질이 많아 
과연 이것을 찍자고 만들었을까 의심스러운 것이 꽤 있다. 

앞서 팔만대장경을 이야기했거니와 
초조대장경, 교장까지 하면 그 목판 수가 몇 장인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며

조선시대를 내려오면 송자대전만 해도 목판이 10000장이 넘게 남아 있다. 

이것을 과연 인출용 순수한 동기에서 팠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으로 필사본. 

일본에는 한국이나 중국보다 필사본에 공덕을 많이 들였다. 

우리는 필사본은 목판이나 활자화 되기 전의 초고에 불과했겠지만

일본은 그 자체가 목적이었고 
이것이 에도시대 이전까지 계속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것도 우리와 그들의 문화적 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요약하면, 

필사본, 활자본, 목판본 중 어느 것으로 할 것인가는

그 결정이 그렇게 임의적이고 즉자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잘 모르는 어떤 원칙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필사본, 활자본, 목판본이 전적으로 경제적 이유에서만 결정되었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고 기상천외한 목적도 많았다고 본다. 

이 정도로 필자, 전공과 무관한 이야기지만

공개 비망기 삼아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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