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에 대해 필자의 의견이 조금 더 남아 써 본다.
흔히 우리나라 활자인쇄에 대해서는,
선학들의 연구로 그 발전 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혀져 있다.
그리고 흔히 활자인쇄에 대한 평가로는
위대한 문화적 성과이지만 구텐베르크 인쇄처럼 광범위한 지적 산업적 혁명을 일으키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라고 결론내린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될 것이,
우리나라의 활자인쇄는 어쨌건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는 점이다.
활자인쇄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돈은 정직하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는 발행부수가 활자인쇄로 가능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장기간 계속되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자인쇄는 사회 전체에 보편화한 것이 아니라
국가주도의 사업으로 남았다.
이건 또 왜일까?
필요한 활자가 많지 않은 서구의 활자인쇄와 달리
한문의 특성상 (모아쓰기를 해야 하는 한글도 마찬가지이다) 필요한 활자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투자가 많지만 한 번 만들어 놓으면 경제적으로 타산이 맞는 부수찍기가 가능했다는 뜻이다.
활자라는 것이 조선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단순히 폼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계산이 나오는 그 뭔가의 조건이 있었다는 뜻이다. '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일본의 고활자 인쇄다.
잘 아는 것처럼 조선의 활자를 탈취하여 인쇄를 시작한 것이 소위 말하는 일본의 고활자인쇄, 경장(케이쵸) 판본이다.
그런데 이 활자인쇄는 일본에서 더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왜일까?
수지가 안 맞았기 때문이겠다.
왜 수지가 안 맞았을까.
조선보다 찍어내는 부수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활자인쇄를 할 때 손익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했고
결국 일본에서 활자인쇄는 쇠퇴하고 목판으로 길을 잡아갔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은 돈에 의해 움직인다.
예외는 있겠지만 전통시대의 책이라고 해도 별 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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