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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보기엔 두 가지다.
첫째는 과거제.
과거제가 시행되어
한적을 읽어내릴 수 있는 식자층 숫자가 확보됨가 동시에
이와 관련된 교보재 서적이 많이 필요해져
목판인쇄가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두 번째는 대장경 조판.
대장경이 불교신앙심의 발로로 국가적 규모에서 조판되어
목판인쇄 수요를 계속 창출했다고 본다.
일본의 경우에는-.
첫째로 과거제가 없었다.
헤이시 이후 무가 정권은 과거제로 책읽을 필요도 없고 싸움으로 날밤을 샌 터라
자연히 식자층은 서울에 사는 공경과 산속의 스님들로 국한되기 시작하여,
책의 수요가 많지 않았던 것 아닌가 싶고,
이러한 상황은 불경에도 영향을 미쳐
신앙심의 발로로 사경을 많이 했지만,
장경 조판까지는 가지 않았고
국가적 규모의 조판사업이 진행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은
무가 정권 내내 마찬가지였다.
이 두 가지 이유가 17세기 이전
한국과 일본의 목판인쇄 수요를 결정하지 않았을까 싶다.
목판인쇄가 흥하느냐 아니냐의 갈림길은 결국,
책 읽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였을 것이라 본다.
물론 한적의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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