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 이전 일본 문헌의 특징은 필자가 보기엔,
에도시대 이전에는 목판이건 활자이건
일본에서 찍어 낸 인쇄물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없는건 아니고 있긴 있는데
현존하는 에도시대 이전 인쇄물의 태반은
한반도나 중국에서 인쇄본을 들여오거나 (불경이나 인쇄서적 등)
일본 국내에도 사찰에서 목판 인쇄등을 했다고는 하는데,
불경을 제외하면 Printed in Japan은 그다지 그숫자가 많지 않은 것 같고,
인쇄본의 수요는 거의 해외에서 인쇄본 도입으로 충당한 것 아닌가 한다.
고려대장경 인쇄본이 일본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서기 고사기,
그리고 칙찬와카슈 등은
에도시대 이전 것으로 남아 잇는 것이 거의 필사본인 듯 하다.
한국의 경우 남아 있는 전적의 다수가
그것이 목판이건 활자이건 간에,
인쇄본이었다는 점이 제일 큰 차이가 아닐까 한다.
이런 양자의 차이가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생각해 본 바 없어 잘 모르겠지만,
한적을 직접 읽어 내려가는 식자층의 숫자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일본의 경우 우리 기록을 보면 이미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에
일본은 대부분이 글자를 읽는다고 했지만, 부연하기를,
가나로 쓴 글자 외에 한문 서적은 거의 못읽는다고 하고,
포로로 잡혀가 쿄토에서 체류했던 강항의 글에도
한적의 경우 스승을 자처하는 자들도 기본적인 한문 글자 구별을 못하고
그대로 한문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이들은 드물다고 해 놓은 것을 보면,
한적을 제대로 읽어 내려가는 식자층이 광범하게 일본에 배출되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 중엽부터이며 이것이 이 시대 일본의 목판인쇄의 호황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다만 일본 내에 한적을 읽어내려가는 사람이 전무했다는 것은 아니고,
강항의 글에도 사찰의 승려들은 꽤 글을 안다고 해 놓은 것을 보면
한문의 독자층이 에도시대보다 많지 않았을 뿐 있긴 있었다고 할 것이다.
요약하면,
한국의 경우에는 한적을 읽어 내려가는 이들의 숫자가 목판 인쇄를 할 정도는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하며,
일본의 경우에는 근세에 이르기까지도 한적을 읽어 내려가는 사람의 숫자가 많지 않았던 것이
양국 서적 문화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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