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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한글시에는 왜 운율이 없는가

by 초야잠필 2024.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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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오래전부터 의문이었다. 

문학계에서는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모르겠고, 

이걸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느끼는 한글시의 문제점을 몇 개 들자면, 

첫째, 아예 없어진 운율. 
둘째. 지나친 작자의 조어(neologism). 
세째. 사상적 경직성. 

쉽게 말해, 

형식 면에서는 지나치게 자유롭고, 
사상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다는 말이다. 

첫째 운율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글의 성격상 운율을 지키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렇다면 요즘 나오는 한글 힙합의 라임은 뭐라는 말인가?
 

텅 빈 방엔 시계소리
지붕과 입 맞추는 비의 소리
오랜만에 입은 코트 주머니 속에 반지
손 틈새 스며드는 memory
며칠 만에 나서보는 밤의 서울
고인 빗물은 작은 거울
그 속에 난 비틀거리며 아프니까
그대 없이 난 한 쪽 다리가 짧은 의자
둘이서 쓰긴 작았던 우산
차가운 세상에 섬 같았던 우산
이젠 너무 크고 어색해
그대 곁에 늘 젖어있던 왼쪽 어깨 (뭐해?)
기억의 무게에 고개 숙여보니
버려진 듯 풀어진 내 신발끈
허나 곁엔 오직 비와 바람
(없다) 잠시라도 우산을 들어줄 사람

 
이 가사를 보면 운율을 매우 적절히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글 특성상 운율을 지킬 수 없다는 건 애초에 거짓인 셈이다. 

두 번째. 지나친 신조어 부분. 

이것 역시 언젠가 지적한 것 같지만, 

한국 시인들은 표현에 대해서 고민하기 보다는 자기만 아는 단어를 선택한다. 

길게 쓰지 않겠다.

사람들이 다 아는 단어를 가지고 고민하여 조합하기 보다는 

자기만 아는 단어로 질러버리고 끝이라는 말이다. 

세째. 이데올로기 부분. 

이것도 길게 쓰지 않겠다. 

필자 생각은 이렇다.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필자는 한글 힙합에서 한국시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많다.

운율, 평이한 단어 사용에 대한 고민, 사상적 자유로움.

시의 본원적 포지션에 한국 힙합이 문학계의 시보다 훨씬 가까이 가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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