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하는 <함안 말이산 13호분 발굴조사 및 주변지역 시굴조사 현장설명회 자료>(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2018. 11)를 재정리하는 한편, 첨삭을 했다. 발굴조사비 규모와 조사단 선정 등은 내가 취재해 보강한 대목이다.
말이산 고분군 제13호분은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937-1번지에 위치한다. 2018년 발굴조사는 13호분 봉분 1천904㎡를 대상으로 하며, 그에 앞서 그 주변 도항리 936·937-2번지 3,157㎡에 대한 시굴조사가 있었다. 조사기간은 착수일 기준 145일(현장 실조사일수)이라,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이 함안군에서 수주했다. 시굴조사 포함 총조사비는 6억6천120만원이며, 조사기관은 제안서 평가를 통해 선정했다. 이 정도 조사비면 거의 예외없이 공개 입찰을 부치나, 이번에는 과감하게 제안서 평가를 시도했다고 한다. 제안서를 낸 기관은 5곳이었다.
말이산 고분군 전졍. 저 뒤쪽 산 앞이 아라가야 추정왕궁지다.
말이산 고분군은 아라가야시대 그 지배층 공동묘지로 추정되거니와, 그 13호분은 주능선 중앙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4호분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봉분으로 꼽힌다. 식민지시대인 1918년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가 발굴조사를 하기는 했지만 유물을 수습하는 수준이었고, 정식 보고서가 간행되지 않은 채 당시 조사 사진과 도면 몇 장만 남았을 뿐이다.
이번 조사는 그간 말이산 고분군에 대한 조사는 적지 않게 이뤄졌지만 주능선을 차지한 왕릉급 무덤은 1917년 조사한 4호분과 25호분 정도에 한정됐을 뿐 그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부족하고, 나아가 최근 13호분 봉분 정상부에서 침하가 발생히면서 정비복원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시작했다.
홀라당 깐 13호분
그렇다면 야쓰이에 의한 13호분 조사는 어떠했는가? 조선총독부에 의한 고적조사 5개년기(1916~1920) 중 제2차년도인 1917년에 이미니시 류(今西龍)가 분포조사를 하는 한편, 이때 4호분과 25호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 두 고분 조사 성과는 『대정6년도고적조사보고』(1920)에 정리가 이뤄졌으니, 이에 말이산 13호분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그러다가 고적조사 5개년기(1916~1920) 제3차년도인 1918년도에 말이산 13호분과 12호분이 야쓰이 책임 하에 조사된다. 그 조사는 도면과 유리건판 사진 일부만으로 간단히 전한다. 『대정6년도고적조사보고』 173쪽에는 아래와 같은 기술이 있으니, 이것이 13호분 조사에 대한 전부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13호분 도면
말이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소재한 위치를 말하자면 말이산 全群에서 主墳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군 중 高峻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本墳(13호분)과 (구)2호분(현19호분), (구)22호분(현11호분) 등이 있는데, 그 중 本墳이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다. 봉토는 礫石이 섞였으나 어린 소나무가 자라고 풀도 덮였다. 南側 下方에 민묘 같은 것이 수기 있다.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방향으로는 구릉 경사면에 접해 봉토 높이는 26尺이고 서쪽 地盤岩石이 노출된 곳에서부터 재면 15尺밖에 안 되며, 직경은 60步다. 산정의 융기를 이용해 加封하여 墳形이 고대高大해 보이는 효과를 거둔다. (본원(今西龍)은 핸드 레벨을 이용해 봉분 소재점 높이를 측정하여 구릉 아래 논바닥에서 本墳 북방에 있는 고개길까지 높이가 64尺이고 고개길에서 本號 정점까지는 104척이 되어 합계 168尺을 산출하였다. 金측량수(김윤성)의 숫자 180尺과 큰 차이가 있어도 김씨 수치에 따라야 함은 물론이지만 참고로 부기한다. (甲)
조사 결과 이 무덤은 우선 봉문 축조 방식이 독특한 점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봉분을 높고 거대하게 보이도록 기존 암반을 적극 활용했다. 무덤이 위치한 말이산은 전체가 무른 셰일계 암석으로 이루어진 함안층이다. 이밎 조사전 육안으로 봉분 기저부에서는 암반층이 노출됐거니와, 표토 제거 결과 봉분 1/3 지점 이상까지 암반층으로 드러났다.
완전한 조사가 이뤄지진 않았지만 기존 암반지형을 깎아내 편평하게 만들고 그 중심에 묘광을 파서 매장주체부를 만들고 그 상층만 주로 돌들을 중심으로 쌓아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돌들은 아마도 암반대를 만들면서 깨뜨린 석재에 점토를 일부 섞은 것으로 보인다.
암반대는 그 위에 쌓은 흙과 돌더미가 유실됨을 막는 호석 구실도 아울러 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석실 내부
침하한 봉분 내부 흙과 돌을 제거하자 석곽 북단벽 부분이 드러났다. 이쪽 덮개돌은 이미 도굴로 유실 혹은 파괴된 상태였다. 그 위로는 1980년대 복토한 층이 확인됐다.
1918년 야쓰이가 조사한 발굴갱도 드러났다. 이 갱은 너비 대략 6~7m 정도이며, 봉분 중간 높이 정도에서 북쪽 방향으로 굴착해 들어 갔음을 알 수 있다. 발굴갱 바닥에는 덮개돌로 보이는 대형 석재와 중소형 석재가 다량으로 깔린 상태였다.
먼저 천장에 횡으로 걸친 덮개돌은 모두 10매가 확인됐다. 석곽 규모로 볼 때 북쪽 도굴갱 쪽에서 3매 정도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개석 한 장은 내부에서 발견됐다. 개석은 육안 관찰결과 대부분 이암 혼펠스제 퇴적암을 사용했지만, 4매는 화강암제로 보인다. 말이산의 대형석곽묘에서는 대체로 화강암제 덮개돌은 1~2매 정도 사용하는 점을 볼 때 이 무덤 축조에 상당한 공력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남쪽에서 8번째 개석은 독특하다. 단면 방형(직경 약 40cm)인 이 돌은 잘 다음은 석주(石柱) 형태로 매장주체부 정중앙에 놓인 까닭에 기준 덮개돌이 아니었나 한다. 최근 조사된 5-2호(경상)에 사용한 석재 들보와도 유사하다.
주칠 흔적
붕괴한 북단벽을 제외하면 세 벽면에서 들보를 박은 시절이 모두 확인된다. 남단벽 개석 바로 아래에서 도리공이 확인되며, 1918년 발굴조사시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이 곳으로 빛이 들어오는 모습이 포착되는데, 이는 아마도 개석을 열고 이곳을 통해 석곽 내부로 진입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은 메운 상태지만 그 형태는 유지한다.
두 장벽에는 각각 2개소씩 총 4개 보공이 대칭되는 지점에 설치됐다. 보공은 벽면 상단 끝부분에서 30cm 정도 아래에서 발견된다. 들보 박음 시설은 너비 대략 40~50cm, 높이 35~45cm, 깊이 80~100cm 정도다.
석실 내부는 채색고분으로 드러났다. 벽면 전체를 적색 안료로 도포했다. 벽면은 잘 다음은 셰일계 점판암 석재를 사용하여 마치 성벽을 쌓듯 정연하게 축조한 다음 벽면을 점토로 곱게 미장하고 그 위로 적색 안료를 채색한 양상이다. 흡사 현대 적벽돌을 쌓은 듯한 모습이다.
별자리 그림
붉은 채색고분으로 가야지역에서는 송학동 1B-1호분에서만 유일하게 드러났으며, 영산강 유역에서는 제법 발견된다. 도굴갱에서 수습한 기대편으로 보아 무덤은 5세기 후반에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남단벽에서 5번째 화강암제 덮개돌에서는 그 아랫면에 각화한 별자리 추정 흔적이 드러났다. 구멍은 크기가 다양해 별 크기에 따라 규격을 달리하여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성혈은 보통 청동기시대 암각화에서 확인되나 삼국시대 무덤 개석에서 확인되는 경우는 이례적이다.
지산동 30호분 개석에서도 사례가 보고됐지만 암각화를 무덤 개석으로 재사용하면서 발견된 데다 암각면이 상면(上面)을 향한 데 반해 이곳은 매장주체부 중앙부 주피장자가 안치되는 공간 천장에 해당하며, 장벽 들보공과 일치하는 곳에 배치한 것으로 보아 축조 기획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사료된다.
별자리 확인 덮개돌 위치
이번 조사 성과를 조사단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말이산 13호분은 고암반대(高巖盤臺)를 이용한 특수 축조공법을 사용하였다.
• 말이산 13호분은 봉분의 규모가 직경 40.1m, 높이 7.1m에 달하는 최대형급의 봉토분이다.
• 현재까지 조사에 의하면, 고대한 봉분을 조성하기 위해 전체를 토재로 쌓은 것이 아니라, 기반층인 셰일계 점판암층을 깍아 내어 봉분의 절반에 육박하는 높이까지의 고암반대(高巖盤臺)를 조성하고 그 상부에 성토하여 봉분을 완성한 것을 확인하였다.
• 이는 저지대에서 토재를 공수하는 공력을 줄이고 암반대로 인해 상부 봉토의 유실을 방지하는 등 효율을 극대화한 아라가야 왕급 무덤만의 독특한 봉
분 축조공법이라 볼 수 있다.
2. 말이산 13호분은 채색고분이다.
• 도굴갱을 통해 매장주체부 내부 관찰 결과, 묘제는 수혈식석곽묘이며 벽면 전체가 적색 안료가 발려진 채색고분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 벽석 사이에는 점토를 발라 접착력을 높이고 벽 외면까지 미장하여 면을 고른후에 적색 안료를 발라 붉은 벽을 조성하였다.
• 마치 현대 적벽돌로 쌓은 듯 상당히 정교하게 축조하였으며 수혈식석곽묘에서 발견된 사례는 국내 처음이다.
• 적색 안료의 성분은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성분과 산지분석을 예정하고 있어, 향후 그 결과에 따라 진전된 학술적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 가야의 채색고분 성립과정에 상당히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3. 매장주체부 개석에서 별자리로 추정되는 성혈이 발견되었다.
• 매장주체부 개석 하면(下面)에서 성혈이 확인되었는데, 의도적으로 성혈면이 석곽 내부에서 바라보이도록 놓았으며 그 위치 또한 무덤 주인이 안치되는 공간에 해당한다.
• 개석은 화강암제로 보이며 촘촘하게 새긴 성혈은 그 형태로 보아 별자리로 추정된다. 전문가의 정밀 분석을 예정하고 있으며, 별자리의 가능성이 높
은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 별자리로 밝혀지게 되면, 가야 최초의 자료로 아라가야의 천문사상에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4. 아라가야 최전성기 왕릉에 대한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 매장주체부 내부의 붉은 채색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생명의 부활 또는 불과 태양을 상징하는 것이다. 말이산 13호의 붉은 채색은 한편으론 아라가야의 굽다리접시에 새겨진 불꽃 문양과도 상호 관련되며 아라가야의 상징성과도 연결된다. 아울러 덮개돌 아랫면의 별자리 성혈은 아라가야의 천문사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추되는데, 이런 유례없는 상징을 갖춘 말이산 13호분은 아라가야 최전성기의 왕을 안치한 무덤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제껏 말이산고분군 주능선 최대형급 봉토분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1917년) 4호분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그마저도 도굴식의 조사로 인해 구조적인 검토에 한계가 있었다. 금번 조사를 통해, 고암반대를 이용한 봉분성토, 석곽 내부 전면 붉은 채색과 별자리를 새긴 개석의 존재 등 5세기 후반대 아라가야 최전성기 왕릉의 실상에 한단계 접근할 수 있었다. 말이산 13호분의 조사는 아직 초기단계이지만 향후, 조사 진행에 따라 더욱 많은 정보를 획득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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