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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비형랑과 화랑세기] (1)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가 사륜계 홍보용?

by taeshik.kim 2024.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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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를 기존 역사학계가 왜 조작된 위서로 몰아야 하는지를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로써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연재물에서는 인류학 혹은 그런 관점이라 부를 만한 분석도 아울러 시도할 것이다.

자연히 드러나겠지만, 현존 《화랑세기》에서 드러나는 인류학적 개념들은 20세기를 살다간 남당 박창화는 결코 꿈도 꾸지 못할 것들이다. 언감생심 어디에서 흉내를 낸다는 말인가?

허무맹랑한 소리 좀 그만 좀 하고 허심하게 화랑세기를 분석 대상으로 보았으면 한다. 

지금 내 책상머리엔 신라사학회 기관지인 《신라사학보》 중 2008년 12월로 발간 일자가 찍힌 제14호가 있다.

그 첫머리에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인 한국고대사상사 전공 신종원이 투고한 ‘《삼국유사》 〈도화녀비형랑〉에 보이는 ‘鬼神귀신’ 세력’이라는 논문이 수록됐다. 

이에서 신종원은 설화성 짙은 이 이야기를 무엇보다 정치투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그에 의하면 진지왕과 그의 아들 비형랑, 그리고 이들 사이에 낀 도화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는 ‘사륜계舍輪系’를 홍보하는 의도를 담았다는 것이다.

신종원은 진흥왕 이후 신라 왕실에는 왕위를 다투는 양대 세력으로 ‘동륜계銅輪系’와 ‘사륜계舍輪系’가 있었다고 본다. 
 

 
저자의 말마따나 진흥왕 사후 신라의 왕통은 진흥왕의 두 아들 동륜銅輪과 금륜金輪을 뿌리로 삼아 교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진흥왕 태자였다가 일찍 죽은 동륜에게는 아들 진평과 두 동생 국반과 흠반 갈문왕이 있었으니, 진평을 뒤이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한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은 모두 동륜의 손녀다.  

반면 일명 사륜舍輪이라고도 하는 진지계 혈통에서는 진지 자신이 아버지 진흥왕 사후 왕위를 이었다가 이내 축출되기는 했지만, 그 손자 김춘추에 이르러서는 왕통을 동륜계에서 이어받아 확고한 사륜계 왕통을 구축하니 말이다. 

비단 신종원뿐만 아니라, 이 시대 왕위를 다툰 혈통으로 이들 동륜계와 사륜계로 갈라보는 견해는 신라사학계에서는 소위 이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정론으로 통용한다.

그 한복판에 《삼국유사》 紀異篇에 수록된 ‘도화녀 비형랑’ 설화가 마치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설화는 진지왕과 그 아들 비형랑, 그리고 진지에게서 비형랑을 낳은 도화녀라는 여인을 세 축으로 삼은 데다 그 주축인 비형랑이 귀신을 부리는 신이한 재주를 타고 났다고 하기 때문이다. 

설화에 의하면 비형랑은 폐위되고 곧바로 죽은 진지왕 혼령이 도화녀라는 여인을 취하여 낳은 아들이다.

귀신의 아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비형랑은 귀신 무리를 수하로 거느리면서 각종 공공사업, 특히 토목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비형랑이 부리는 귀신 무리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신원사神元寺라는 사찰 북쪽 도랑에다가 하룻밤에 뚝딱 다리를 놓았는가 하면, 흥륜사興輪寺라는 사찰 남쪽에는 누문樓門도 쑥닥 건설했다.
 

 
그런 까닭에 신원사 근처 다리를 귀신 다리라 해서 ‘귀교鬼橋’라 했는가 하면, 흥륜사 문루는 그 공사를 감독한 이가 비형랑 부하인 길달吉達이었으므로, ‘길달문吉達門’이라 했다고 한다. 

나아가 비형랑은 너희 무리 중에 쓸 만한 인재가 없느냐는 진평왕 요구에 응해 앞서 말한 길달을 추천했다고 한다. 

이로써 본다면 귀신의 정기를 타고난 비형랑은 그에 걸맞는 능력을 맘껏 발휘해 귀신들을 부려서 공공 토목사업을 일으키고, 인재도 추천하는 일을 한 셈이다. 

이런 점에 착목해 많은 신라사 연구자가 이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 중에서도 특히 비형랑과 관련해서는 그가 진지왕 아들이라는 사실을 버무려서, 바로 진지왕에게 혈통을 찾는 소위 ‘사륜계(금륜계)’ 왕통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런 이해에서 신종원 역시 한 치 어긋남이 없다. (2017. 2. 19) 

 
*** 
 
어줍잖은 개똥윤리로 화랑세기를 논하는 자가 적지 않아 다시금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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