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문화 이모저모

한번 보고 두번 보고 못잊어 다시 찾은 기생

by taeshik.kim 2024. 2. 20.
반응형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의 불후한 야담필기류인 《용재총화慵齋叢話》 제5권에 보이는 대중례待重來라는 기생 이야기다.
 
김 사문金斯文(사문斯文은 유학자를 지칭하는 말-인용자)이 영남에 사신使臣으로 내려가 경주에 도착하니, 고을 사람들이 기생 하나를 바치기에, 김이 데리고 불국사로 갔었는데, 기생은 나이가 어려서 남자와의 관계함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극력極力 김의 요청을 거절하다가 밤중에 도망쳐 나왔는데, 그녀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여러 하인이 그녀가 짐승에게 잡혀 간 것이 아닌가 하여 이튿날 찾아보니 그녀는 맨발로 고을에 돌아가 있었다. 김은 뜻을 이루지 못함에 실망하고는 밀양에 도착하자 평사評事 김계온金季昷을 보고 그 사정을 말하니, 평사는, “내 기생의 동생으로 대중래待重來라는 애가 예쁜 모습에 성품이 그윽하고 조용하니, 내가 그대를 위하여 중매해 주겠소.” 하였다. 

하루는 부사府使가 영남루嶺南樓에서 잔치를 베풀어 기생이 자리에 가득했는데, 개중에 하나가 좀 예쁘기에 김 사문이 물으니, 그가 바로 평사가 중매한다던 기생이었다. 김은 겉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으나 마음은 늘 이 기생에게 있어서 상에 가득 찬 맛있는 안주도 먹기는 하여도 달지 않았다.



 
주인과 시객侍客이 모두 술잔을 바치기에 김이 일어나 잔을 권하자 평사가 그 기생을 시켜 잔을 받들어 바치게 하니, 김은 흔연히 웃으면서 의기양양한 기색이 있는 것 같았다. 
 
이날 밤 그녀와 함께 망호대望湖臺에서 자고부터는 서로 정이 깊이 들어서 잠시도 떠나지 못하여 대낮에도 문을 닫고 휘장을 치고서 이불을 쓰고 일어나지 않으니, 주인이 밥상을 가지고 와서 뵙고자 해도 서로 만나지 못한 지 여러 날이었다. 
 
평사가 창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두 사람은 안고 누워 손발을 서로 꼬고 있을 뿐, 다른 말은 않고 오직, “나는 너를 원망한다.”고만 하였으며, 온몸에 써 있는 글자를 모두 서로 사랑을 맹세한 말이었다. 

그 후 그는 여러 읍을 순력巡歷하였으나 마음은 항상 대중래에게 있었다. 하루는 사문斯文 윤담수尹淡叟와 김해에서 밀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이야기하다가 장생長栍을 보면 반드시 하인으로 하여금 이수里數의 원근遠近을 자세히 보게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도 오히려 더디감을 의심하더니, 갑자기 펀펀한 들판이 아득한데, 어렴풋이 공간에 누각의 모습이 보였다 없어졌다 하니, 하인에게 묻기를, “이곳이 어딘가.” 하니, 하인은, “영남루입니다.” 하여 김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웃으니, 사문이 연구聯句를 짓기를, 

들녘은 넓은데 푸른 봉우리 가로질렀고 / 野闊橫靑峯
누각은 높아 흰 구름이 기대었네 / 樓高倚白雲
길가에 장승이 있으니 / 路傍長表在
응당 관문에 가까움을 기뻐하리로다 / 應喜近關門



 
하였다. 밀양에 도착하여 수십 일을 머무르니, 주인이 오래 있을 것을 염려하여 송별연을 누상樓上에서 베풀어 위로하니, 김은 부득이 행차하기로 하여 기생과 더불어 교외郊外에서 이별하였는데, 그는 기생 손을 꼭 붙들고 흐느껴 울 뿐이었다. 

어느 역驛에 이르러 밤은 깊은데, 잠을 이루지 못하여 그는 뜰을 거닐다가 눈물을 흘리며 역졸驛卒에게, “내가 차라리 여기서 죽을지언정 이대로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네가 다시 한 번 대중래를 만나게 해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니 역졸이 불쌍히 여겨 그의 말을 따랐다. 

밤중에 수십 리를 달려 날이 샐 무렵에 밀양에 도착했으나 부끄러워 부府에 들어가지 못하고, 은띠를 역졸에게 주고 흰옷 차림으로 울타리 길을 걸어가니, 우물에서 물긷는 노파가 있기에 김이, “동비桐非(대중래의 아명)의 집이 어디 있소.” 하고 물으니, 노파는 “저 다섯 번째 집이 그 집입니다.” 하였다. 




김은 다시, “네가 나를 알겠느냐.” 하니 노파는 한참 쳐다보다가, “알겠소이다, 지난 가을에 방납防納의 일로 오셨던 어른이 아니십니까.” 하였다. 김이 돈주머니를 풀어 노파에게 주면서, “나는 방납수防納叟가 아니라 경차관敬差官이니, 나를 위하여 동비에게 가서 내가 온 것을 말하여라.” 하니 노파는, “동비는 지금쯤 본남편 박생朴生과 더불어 같이 자고 있을 것이니 갈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이, “내가 만나볼 수는 없더라도 소식만 들을 수 있다면 족하니, 네가 가서 내 뜻만 말해 주면 후히 보답하리라.” 하니 노파가 그 집에 이르러 분부대로 말하였다. 

기생은 머리를 긁으며 말하기를, “딱한 일이다. 어찌 이렇게까지 할까.” 하니 박생이, “내가 그를 욕보일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는 선생이요 나는 한갓 유생이니, 후진으로서 선배를 욕보이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잠깐 피하리다.” 하고 숨어 버렸다. 
 
김이 기생집에 들어가니 관사官司에서 이 일을 알고 몰래 찬과 쌀을 보내었다. 여러 날을 유숙하자 기생의 부모가 미워하여 내쫓으니, 두 사람은 대밭 속에 들어가서 서로 붙들고 울부짖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웃 사람들이 다투어 술을 가지고 와서 주었다. 기생을 데리고 가려 하는데 다만 말이 세 필뿐이므로 한 마리는 그가 타고 또 한 마리에는 이부자리와 농을 싣고, 나머지 한 마리에는 수종隨從하는 사람이 탔었는데, 결국 수종인의 말을 빼앗아 기생에게 화살을 메고 말을 타게 하고 수종인은 뒤로 따라 걷게 하니, 신이 무거워서 걸을 수가 없어 끈으로 신을 묶어서 말 목에다 걸었다. 

역에 돌아와서는, 역졸이 모자와 띠를 섬돌에다 내동댕이치면서,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으나 이처럼 탐욕스러운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그의 아내가 죽으니, 김은 관을 실어 중모中牟에 장사지내고 장차 밀양으로 향하려고 유천역楡川驛(경북 청도역원淸道驛院)에 이르러 시를 짓기를,

향기로운 바람이 산 위 매화에 부니 / 香風吹入嶺頭梅
꽃다운 소식은 이러하되 돌아오지 않음을 괴로워하도다 / 芳信如今苦未回
달빛이 희어 시냇물 20리에 어리었는데 / 月白凝川二十里
옥인은 어디서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가 / 玉人何處待重來
 
하였다. 당시에 감사 김 상국金相國이 마침 그 기생을 사랑하다가 김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주니 김이 서울로 데리고 갔다. 뒤에 김은 승지가 되어 벼슬이 높아지고 녹봉이 후해졌으며, 기생은 두 아들을 낳고 마침내 정실부인이 되었다.
 
(2018. 2. 20) 

 




*** 

 
장생長栍이란 장승이라 하는 것으로, 이에는 이에서 어디까지가 몇 리라는 거리 표시가 있었다. 

성풍속이 파천황입네 어떠네 저떠네 하는 거지 발싸개 같은 논리로 역사를 재단하는 놈들은 사라져야 한다.

함에도 왜 이런 놈들이 끊이지 않는가?

배워 쳐먹은 게 없기 때문이다. 지가 아는 윤리가 곧 인류를 통괄하는 도덕윤리라 생각하는 까닭이다. 

사랑? 사랑에 풍속이 어딨단 말인가? 오직 본능만 지배할 뿐이다. 

육식 본능. 본능 앞에 장사 없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