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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19세기 역사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민중과 농민이라는 용어가 너무 남발되는 경향이 있다.
민중과 농민이라고 쓰는 순간 연구 대상이 모호해지며
도대체 누구를 지칭하는것인지 분명해지지 않고
그 다음부터 쓸데 없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들어가
논문이 아니라 정치 격문이 된다.
예를 들어 동학농민전쟁
여기서 농민이라는 말은 필요 없는 단어다.
동학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고 본다.
여기에 농민 혹은 민중이라는 말로 덕지덕지 붙여 놓아
이 전쟁의 근대성이 확고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라고 보기 때무이다.
예를 들어 전봉준.
전봉준의 출신과 혁명과정에서 그의 행동을 보면
이 사람은 농민이라는 말로 간단히 재단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아니 이 사람 뿐 아니라 동학운동의 지도자급 사람 대부분이 마찬가지인데
심지어 동학전쟁에는 사마시 출신도 다수 가담한 것을 보면
이 전쟁을 단순히 동학농민전쟁이라고 퉁쳐서 부르는 것이 타당한 이름인가.
농민이라는 이름부터가 모호한 주장인데
한국 근현대사에서 남발하는 민중이라는 용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시기 역사 주체를 농민, 민중이라고 설정하고 부르다 보니
향촌에서 끓는 물처럼 분출되어 나오던 가짜 양반들은 온데간데 없어지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19세기 격동의 중심에는
이들 가짜 양반이 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세파를 헤쳐나간다는 자신감에 있어서도
19세기의 주인공은 가짜양반들 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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