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에 제2차 조선교육령이 발표된 후
신교육령에 따라 조선의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은
상급학교 진학 자격이 주어지지 않아
혼란이 야기되었다.
사실 조선의 고등보통학교란
일본의 고등소학교에 해당하는 학교 였는데
이는 대학진학을 할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이 시기 일본의 교육제도를 보면 아래 표와 같다.
위 표를 보면 고등소학교가 바로 우리의 고등보통학교에 해당하는 것인데, 수업 연한으로 보면 우리는 5년으로 되어 있어
일본의 고등여학교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등소학교가 됐건, 아니면 고등여학교가 되었건
일본의 경우 이쪽 길을 타게 되면 대학으로는 가지 못한다.
대학을 가려면 무조건 중학교를 나와야 하는데,
이 시기 조선인들은 중학교 진학자가 거의 없었고
대개 일본인들이 중학교,
조선인들은 고등보통학교로 정해져 있다시피 했다.
따라서 경성제1고보생 (후일의 경기고)은
조선바닥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사람을 모아놨어도
신교육체제 하에서는 진학할 학교가 없는 것이다.
경성1고보생이라면 대학진학까지 희망했을 텐데,
대학예과와 고등학교 진학자격이 주어지지 않는 탓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경성제대가 생겨 여기 예과가 설치되었을 떄도
조선인 입학자가 극히 드물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교육제도 때문이었다.
고보를 나와도 상급 교육기관인 대학 진학이 극히 어려워
조선인의 경우 국내에서 전문학교를 진학하거나
아니면 일본으로 가 경과 과정을 1-2년 거친 후
대학 예과에 들어가거나 했다.
애초에 조선바닥에는
조선인을 고등보통학교로 유도하고,
고등학교도 하나 없이
대학예과를 딱 하나만 만들어 놓으면
조선인은 모두 실업계 외에는 진학이 불가능해져
고학력자의 배출이 불가능해지게 설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위의 1923년 기사에서 고보생에게 상급학교 진학자격이 없다라는 뜻은
고보를 졸업한 조선인은 당연히 대학 진학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므로,
저것은 총독부의 착오나 무관심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적의 설계된 제도 자체의 문제였다 하겠다.
조선인들이 주로 다니는 저 "고보"란 1938년까지도 계속 저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일제시대가 거의 끝날때가 되어서야 "고보"가 "중학"으로 재편되어
제도상 차별은 표면적으로 해소되었다고 하지만
저 시기는 이미 중일전쟁이 시작되어 일제강점기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으므로
아무 의미가 없는 제도 개선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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