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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부여나성 동문, 웅진으로 통하는 길목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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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조로 드러났다는데, 문터 중앙 지점을 발굴해 봐야 한다. 저 구조대로라면 왕이 다닐 길이 없다. 왕이 다니던 통로는 따로 있어야 한다. 동쪽이라면 웅진 쪽으로 통하는 통로일 텐데, 그쪽은 왕이 제사지내러 수시로 다녀야 하는 길이다. 부여군 백제문화재단 제공

 
충남 부여군과 백제문화재단이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 일환으로 사비시대 백제 도성을 보호 혹은 경계하던 담장인 그 나성羅城이 내외부로 통하는 관문 중에서도 동쪽 대문 흔적이 드러났다 하거니와 

상론하기를 이번 조사를 통해 삼국시대 성곽 문지門地 가운데 최대 규모임을 확인하는 한편 그 문루門樓를 받치하는 기둥 구조, 두 개 출입 통로를 확인함으로써 전면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대형 문지와 문루 전체 구조는 물론 백제 왕도의 출입 체계와 방어시설, 도시계획을 종합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확보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거니와

이로 보아 이번 조사는 고고학 조사 방법 혹은 단계 중에서도 본격 발굴에 대비해 그 유적 분포 현황과 분포 범위를 짐작하는 시굴 조사가 되겠다.

왕이 거주하는 집을 왕궁이라 하고, 그런 왕궁을 보좌하는 핵심 도시기반시설을 왕경王京이라 하거니와, 이런 공간은 신성공간이라 그것을 표식하는 경계 시설을 두기 마련이어니와 동아시아의 경우 거대 이런 시설을 이중 삼중으로 구성하게 되거니와 

왕궁을 감싼 담장을 내성內城이라 한다면, 그 도심과 그 바깥을 경계짓는 담장은 외성外城이라 한다. 이 외성을 경우에 따라 이중으로 두르기도 한다. 

이 도시 전체 외곽을 두른 경계 시설을 흔히 나성羅城이라 하는데, 이 경계는 실은 특권 지역 설정이라,

우리 역사에서는 이런 특권 지역으로 삼한시대 소도를 떠올리는 이가 많지만 천만에. 그런 특권 구역은 역사를 통괄해 존재했다.

한성에서 나라를 말아먹고 공주로 도망간 백제 왕조는 그 공주도 이내 좁다 생각했음인지 인근 부여를 새로운 왕경으로 설정하거니와,

이곳까지가 왕경이다 라는 표식으로써 나성을 만들었으니, 그 흔적이 현재까지도 비교적 잘 남아 그 안쪽 구역을 우리는 편의상 사비도성이라 하고, 그 경계 표식을 부여나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부여 나성을 두고서 저 두 기관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축조한 사비도성의 외곽성으로, 도성을 방어하고 왕도의 경계를 형성한 핵심 시설"이라 하지만, 냉혹히 평가해야 할 지점은 도성 방어시설이라는 대목이라, 저 도성은 실은 방어력이 없다.

이는 한양도성 역시 마찬가지라, 방어력을 운위하기에는 포진 범위가 너무 커서 방어할 수가 없다!

그보다는 이곳을 기준으로 안쪽은 신성구역, 바깥은 그 신성구역 밖이라는 개념이 크다!
 

이번에 확인했다는 동쪽 문터는 웅진으로 통하는 길이다. 부여군 백제문화재단 제공

 
암튼 이번 조사에서 조사단은 "월함지의 성격과 동나성 성벽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2025년 12월에 착수해 현재까지 진행 중이라 하거니와, 이에서 동나성 성벽과 함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동문을 확인했다 하거니와

이번에 확인한 문터는 폭이 약 10m에 이른다고 하니, 이는 지금까지 확인된 삼국시대 성곽 문지가 대부분 폭 4~5m 안팎이며 기존 최대 사례인 풍납토성 서문터가 폭 약 7m 정도인 것과 비교할 때도 최대 규모라 한다.

그러면서 향후 전면 발굴 조사가 벌어진다면 그 규모는 더 확대할 것으로 본댄다. 

나아가 이번 조사에서는 평지 구간 문이 있던 시설을 기준으로 그 양쪽 성벽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은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문이 본래 어찌 생겨먹었을지를 짐작할 만한 기반을 확보했다고 의미 부여를 한다.

문이 있었다면 그 문을 지탱한 기둥 구멍이 있었을 터. 당연히 그 문루를 지탱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나무기둥 흔적을 뚜렷하게 확인했다 하거니와, 특히 중앙 지점을 따라 기둥열이 일렬로 배치된 모습을 볼 적에 좌우 두 개 출입 통로를 갖춘 구조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댄다.

조사단 추정대로라면 들락거리는 구멍이 달랐다는 뜻이 될 터이다.

나아가 보통 이런 도성 대문은 왕이 다니는 특권적인 중앙토로를 별로도 마련하기 마련인 바, 그런 특권 출입시설이 드러나지 않은 점은 의문을 증폭하거니와, 혹 이 문이 왕이 다니는 길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이 두 개 통로를 조사단은 "사람과 수레가 효율적으로 통행할 수 있도록 계획된 백제 왕도의 출입 체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하거니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 동문과 연결되는 지점 성벽 역시 당연히 내부 구조가 드러났을 터. 성벽은 기반층을 단단하게 다진 후 지대석을 설치하고 장방형 석재를 이용해 바깥벽을 만들고, 내부에는 뒤채움석과 다짐흙을 이용했다 한다.

조사단은 이를 백제 석축 성벽의 축조기법이 잘 남아 있다고 평가했지만 저런 방식은 동아시아 전체를 관통하며, 백제만의 특징이라 간취할 수는 없다.

문터는 구조를 일부 변경한 흔적도 확인함으로써 성문이 최소 두 차례 이상 개축했음을 보여준다 했거니와, 목조건축은 길어봐야 생명이 50년이라 당연히 고치지 않았겠는가?

조사단은 올해 조사가 유적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시굴조사였거니와, 이를 토대로 삼는 전면 발굴은 내년에 시작할 예정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 조사비는 누가 댔는가?
국민이다!

부여군이, 백제문화재단이 무슨 돈이 있다고 저런 조사비를 대겠는가? 불특정 국민이 부담한 국민 세금을 들이 쏟아부었다.

간단하다. 저 발굴현장 소유권은 국민으로 귀속한다. 저 조사비를 대준 국가유산청은 지들이 갖은 주인행세하지만 그들은 국민의 대행자요 꼭두각시일 뿐이다. 
 
***
 
부여나성 평면도에서 동문 위치를 봐야 정확히 저에서 연결되는 도로가 웅진으로 통하는지를 짐작하겠다. 웅진과 사비는 금강 수로 이용도 많았으리라 본다. 특히 공주를 출발하는 길은 더 그랬을 것이다. 물길을 따라 그냥 놔두면 지가 알아서 부여까지 흘러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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