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관룡사 각석을 이를 발견하고 보고한 창녕군·삼강문화재연구원에서는 ‘창녕 대중大中 9년명年銘 개심방開心房 토지소유 공증비公證碑’라 명명했거니와
그 판독과 해석, 해설을 다음과 같이 했다.
• ‘창녕 大中9年銘 開心房 토지소유 公證碑’ 판독반
김동철(부산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이수훈(부산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위은숙(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이효종(국립진주박물관 학예사)


大中九年丙子 元宗法師 開心房中 入乎田畓一結卆四負七束 以條立 習北里 甘宣(策)加等 阿林下畓十七負 茅村下畓十三負 同村北田十三負 牛川田七負 廐旨田十三負 同村田三負 又麻田一良 桐旨畓卄負 又大城里 近赤沙平條加等 阿林七負田 亦畓反 大藪 布文仸之時 聞賜 大德太常 上坐香冏 唯乃郞等 道官澄淨·瓊蕳硲 唯乃興輪寺良崇
又入陳知畓三十四負二束 夜六 仇旀田十負五束 畓反 夜六
대중大中 9년 병자년丙子年(856년)1)에, 원종법사元宗法師의 개심방開心房2)에 들어온[入] 전답田畓 1결結 94부負 7속束을 조목조목 나열하였다. 습북리習北里 감선(책)甘宣(策3))에 붙은 아림하답阿林4)下畓 17부, 모촌하답茅村下畓 13부, 동촌북전同村北田 13부, 우천전牛川田 7부, 구지전廐旨田 13부, 동촌전同村田 3부, 또 마전麻田 하나랑,5) 동지답桐旨畓 20부, 또 대성리大城里 근적사평近赤沙平 경계에 붙은 아림7부전阿林七負田도 답畓으로 만들었다. 큰 절[大藪6)]에서 공포문을 아직 반포하지 않았을 때 들으신 분은, 대덕大德 태상太常, 상좌上坐 향경香冏, 유내唯乃 낭등郞等, 도관道官7) 징정澄淨·경간곡瓊蕳硲8), 유내唯乃 흥륜사興輪寺 양숭良崇9)이다.
또 (개심방에) 들어온[入] (전답은) 진지답陳知畓이 34부 2속으로 배미[夜]10)가 6개이고, 구며전仇旀田은 10부 5속인데 답畓으로 바뀌었으며 배미[夜]가 6개이다.11)
(주석)
1) 大中은 당나라 宣宗의 연호로서 847년부터 860년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大中 9년은 을해년으로 855년이 되고, 병자년은 대중 10년으로 856년에 해당된다. 여기에서는 연간지(歲次)인 丙子를 우선시하여 이 비문이 작성된 해를 856년으로 판단하였다.
2) 여기에 나오는 ‘開心房’은 원종법사가 계시던 암자의 명칭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하게 암자를 ‘房’으로 표현한 사례로는 변산의 불사의방不思議房(『삼국유사』 권4 제5 의해, 관동풍악발연수석기), 오대산의 미타방彌陀房, 관음방觀音房, 지장방地藏房(『삼국유사』 권3 제4, 탑상, 대산오만진신)이 있다.
3) 이 글자는 형태로 볼 때 ‘책策’에 가까운데, 추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책策’으로 본다면, ‘경계’ 정도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물가에 있는 숲으로 여겨진다.
5) 여기서는 ‘良’을 이두로 보았지만, ‘良’을 뒤로 붙여 ‘양동지답良桐旨畓’으로 읽을 여지도 있다. 본 비문의 ‘마전麻田’은 면적에 대한 단위 표시가 없어서 흥미롭다. 본 비문에는 이때 개심방에 들어온 전답의 총 면적을 1결 94부 7속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문에 나열된 각각의 전답을 전체적으로 계산해 보면 총면적에서 ‘1결 1부 7속’이 부족하다. 이 부족한 면적이 마전의 면적이 아닐까 한다.
6) ‘大藪’가 어느 사찰인지 구체적 자료가 없지만, 부속암자인 ‘개심방’을 관할하는 ‘大寺(큰절)’로 판단된다. ‘藪’가 절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예는 ‘鉢淵藪’(강원도 고성군 외금강산 발연사)와 ‘桐藪’(대구 팔공산 동화사)가 있다.
7) 여기의 ‘上坐’와 ‘唯乃’는 三剛職의 하나이다. ‘大德’은 고승의 존칭이면서 승직을 가리키기도 하고, ‘道官’은 승려로서 관직을 가진 자로 추정된다.
8) 승려의 명칭이 세글자인 경우는 드물지만, 여기의 ‘경간곡瓊蕳硲’은 전체 문맥상으로 볼 때, 승려의 법명으로 판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 이유는 ‘唯乃’의 명칭 가운데 ‘都唯乃(「상원사동종명」, 725 년)’와 ‘節唯乃(「양양 선림원지 종명」, 804년)’ 처럼 ‘都’와 ‘節’이 붙는 사례는 있어도 ‘硲’이 붙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9) ‘良崇’은 유일하게 소속 사찰을 표기하여 흥미롭다. 이 ‘良崇’은 872년에 작성된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의 道監典 부분에 등장하는 ‘當寺上座 (중략) 僧良嵩’과 동일한 인물로 생각된다. 이 양숭의 표기 사례를 고려할 때, 본 비문에서 소속 사찰의 표기가 없는 나머지 승려들은 ‘大藪(큰절)’ 소속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10) 여기의 ‘夜’는 야미夜味(배미)로 여겨진다. 야미夜味는 다른 논과 구분되어 있는 논의 한 구역을 나타내는 말로서 필지의 개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夜’는, ‘夜’가 배미의 의미로 사용된 가장 오래된 사례일 가능성이 크다.
11) 본 비문은 16행 162자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해서로 작성되었다. 글자의 형태와 크기를 고려할 때 두 번에 걸쳐서 새긴듯하다. 1행부터 14행까지를 먼저 작성하고 뒷부분의 2행(15・16행)은 추가로 기록한 것으로 판단된다.
○ 본 비는 9세기 중엽(856년) 당시 개별 사원의 토지소유 양상과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방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판단된다. 특히, 본 비문에 등장하는 번답(反畓)의 사례는 이 당시 농업기술의 실체와 변화를 밝힐 수 있는 획기적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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