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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내가 겪은 카투사KATUSA와 JSA의 추억

by taeshik.kim 2018.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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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JSA 포스터


지금은 폐쇄된 우리 공장 연합뉴스 내 블로그에 2005년 08월 01일 21시 32분 26초에 같은 제목으로 게재한 잡글인데, 당시 글 오타와 문맥상 문제가 있는 조사 정도 바로잡는 수준에서 전재한다. 당시 글을 전재하는 까닭은 그래야만 당시 내가 이 글을 올린 사정과 부합하는 대목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1987년, 18년 전 얘기다. 당시 시위현장에서 단연 유행하던 구호는 


1. 호헌철폐 2. 독재타도


이 두 가지였다. 이 외에 또 하나 익숙한 것이 


양키 고우 호움!


이었다. 대학가 사회에서 이 양키에 대해서는 묘한 구석이 있다. 그 묘한 구석에서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 묘한 구석이 군대(MILITARY SERVICE)로 옮겨갈 요량이면 특히 그랬다. 미국에 대한 끝 모를 증오. 그러면서도 그 그늘을 찾아 헤메는 한 부류가 있었으니 나 같은 놈이 거기에 해당한다. 


나는 카투사KATUSA로 복무했다. 이 카투사 이니셜에 대한 의문을 표하는 이가 더러 있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면 Korean Augmentation Troops to the United States Army이다. 한국군은 한국군이되 증강군이니, 무엇에 대한 증강이냐? 미군에 대한 증강군이니, 카투사 그 묘한 지위가 이 명칭에서도 드러날 지니,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덤이 바로 카투사라, 명색도 그렇고 실제로도 그러한 측면이 다분히 있다. 


이 미군에 대한 증강군에서 예외가 되는 카투사 족속이 JSA 근무병이다. 이 말은 영화로도 유명해졌거니와 '공동경비구역'이라 하니 Joint Security Area가 그 약자이니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근무병을 말한다. 일전에 영화 《JSA》에서는 이병헌이 주연했으나, 요즘은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당시 내가 카투사로 복무하던 그 시절만 해도, 이병헌 실제 키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커 봐야 175센티 남짓할 듯한데 이렇게 짜리몽땅한 JSA는 상상도 불허한다.


그래서 이 JSA와 관련한 나의 추억 한 토막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를 위해 당시 카투사 선발제도를 일별할 필요가 있느니, 지금은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내가 카투사가 되던 그 시절 선발 방식은 두 가지가 있어,   


1. 시험이요

2. 논산 연무대 차출이니,


1. 시험이란 말할 것도 없이 카투사가 되겠노라 병무청에 자발적 지원서를 내어 정해진 날짜에 시험을 보아 그 결과 여하에 따라 뽑히는 것이니, 해병대는 그런 비교 자체를 기분 나빠할 지 모르나, 적어도 자원이라는 점에서는 해병대나 카투사나 진배가 없다. 


2. 논산연무대 차출이란 시험 선발 외의 방식으로 논산에 입소한 자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가려 뽑은 자들이니, 참말로 묘한 것은 당시 미국에 대한 그 강렬한 대학 사회의 증오와는 상관없이 이 시험병과 차출부대원 사이에도 묘한 차별이 존재했으니, 말할 것도 없이 이 경우 차별이란 시험병들의 차출병들에 대한 이유없는 우월의식이 그것이다. 한마디로 말하건대 우린 시험으로 된 자들이고, 니네들은 줄 잘 서서 카투사된 자들이니 너희와 우리는 구별된다, 뭐 이런 우월의식을 말한다.


당시 이 시험병과 차출병은 전체 카투사 병 중 거의 정확히 반반 정도 비율을 차지했다. 나는 시험병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은 없으나 필기시험으로 사실상 당락이 결정되었는데, 시험과목은 1. 영어 2. 국사는 확실하고 3. 국어가 들어갔는지 아닌지는 가물가물하다.


시험이라면 이골이 난 나는 가뿐히 합격이 되었으니 1987년 중반 무렵에 합격이 되고 나서, 입영통지서를 받아보니 1987년 11월 20일에 논산 연무대로 입소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카투사 동기는 내 기억으로는 4개 소대였고, 한 소대당 40명에서 거의 빠짐이 없었으니 4 x 40=160명가량이었던 듯하다.


당시 자대 배치까지 훈련 방식은 1. 논산훈련소에서 한 달 땅개 훈련 2. 별도의 논산 훈련소 다른 연대에서의 1달 추가 훈련. 3. 카투사 훈련소에서의 다시 한달간 별도 훈련, 이렇게 총 석달이었다. 나는 이 중 논산훈련소 30연대에 입대했으니, 이 한달간 다른 일반병과 똑같은 훈련을 했다. 그 훈련을 마친 다음 카투사를 위한 추가 한달간 별도 훈련은 예외없이 27연대로 고정되었다.  


입대일이 11월 20일이었으니 열라 추운 시절을 논산훈련소에서 두 달을 보냈다. 그 추위란 지금 생각해도 지긋지긋하다. 전방 군대생활한 사람들은 웃을 지라도 나는 상관 안 한다. 


이 27연대에는 카투사를 포함해 의경과 전경의 3가지 부류가 함께 훈련을 받았으니, 복무 기간은 아마도 달랐을 것이다. 나 같은 카투사병은 엄연히 소속은 한국 육군이니, 당시 30개월을 채워야 했다. 나는 1학년 때 성남 연무대 잠깐 입소하고 교련을 이수한 데다 2학년 때는 전방 입소에 더하여 역시 교련까지 충실히 받았으니 3개월 병역 단축 혜택을 보아 27개월을 근무하면 되었다. 애니웨이 나 같은 육군이 30개월이었던 데 반해 의경과 전경은 아마도 서너달 복무기간이 더 길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 27연대 이 세 부류 족속에 대해서는 무슨 분류 체계가 있었는데, 카투사는 대가리는 좋으나 몸은 제일로 굼뜨고, 전경은 대가리는 안 좋으나 몸은 제일 빠르고, 의경은 대가리도 나쁘고 몸도 느리고다는 뭐 이런 식의 분류 코드가 횡행하고 있었다. 이 27연대를 합쳐 총 두 달간 논산 훈련을 끝낸 다음 카투사 예정병들은 평택 캠프 험프리스에 있는 KRTC라는 카투사 교육대로 간다. 여기서 교관은 1. 카투사 2. 미군의 두 그룹으로 분류되는데, 이 미군 교관은 영화 같은 데서 보는 것이랑 폼새가 기본적으로 똑 같다고 보면 된다. 


당시 기억이 생생한 한국 카투사 교관이 한 명 있는데 그 이름은 아마도 김상수였을 것이다. 나이는 나 하고 같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계급은 상병이라 그 출신이 묘한 데가 있었다. JSA 출신이기 때문이다. 듣자니 JSA에 차출되어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평택 신병교육대 교관으로 있었다.


이 친구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는데 아침 구보 때면 늘상 양놈 막사 앞에다가 훈령병들을 세워놓고 한국 군가를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양놈 막사를 향하여 힘찬 구령 조정 3회 실시 뭐 이런 식으로 미군을 향한 끊임없는 증오심을 표출하곤 했다. 


이 평택교육대 KRTC에서 공포의 순간이 두 번 있다. 물론 그 두 번째야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어느 곳 어느 부대에 배치되는가 하는 자대 발표 순간이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나 당시에는 당연 제1 선호 지역은 당연 빠따로 용산이었다. 캠프 코이너 말이다. 맨날 시내로 싸질러 나올 수 있었으니 그 선호도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 첫 번째 공포가 바로 JSA 근무병 차출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평택 훈련소 생활 막바지 무렵에 그 과정이 있는데 선발은 JSA 친구들이 직접 나와서 대상자를 뽑아갔다.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첫째, 키 180센티 이상일 것, 둘째, 안경을 쓰지 않을 것.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충족시켜야만 했다. 왜 이런 조건을 내세웠는가? 북한에 비해, 나아가 묘한 경쟁상대인 미군에 비해서도 꿀리지 말아야 한다는 저 절체절명한 민족주의 정신이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물론 그 자리서 자원할 수 있다. 세상에 꼭 그런 친구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 동기 중에서도 소위 의협심이랄까 모험심이랄까 그런 정신이 유난히 강한 듯 한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공동경비구역 지원을 자원하고 나섰다. K大 다니다 온 친구다.  이 친구는 얼굴이 참으로 미끈하게 잘 생겼다. 또 안경도 쓰지 않았다. 한데 딱 하나가 문제였다. 키가 177센티였다. 180이상이어야 하는 조건에서 불과 3센티 모자랐다. 누구 자원할 사람이라고 JSA 친구들이 외쳤을 때, 그리하여 이 친구가 앞으로 자원하여 나아갔을 때, 


"너 키 얼마야?" 


라는 물음에 


"예 177입니다"


는 답변이 나오자마자 JSA 친구가 그랬다. 


"피라미 좃 만한 게 까불고 있어. 들어가 쒜끼야!" 


그리하여 이 친구는 되고싶은 JSA 근무병이 되지 못했다. 키와 안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이 두 조건은 이 자원병에게는 되지 못한 장벽이었으나 JSA가 되고 싶지 않은(그쪽 근무는 지옥이라고 이미 훈련병들 사이에서 통했다) 친구들에게는 되고 싶지 않은 조건을 만들어내는 기제로 작동했으니, 180센티 이상이 되는 친구들이 키를 잘라낼 수는 없는 법이고, 그리하여 JSA가 되지 않을 다음 조건, 즉, 안경을 쓰는 것으로 가장하는 방식이 있었으니,


하지만 이에서도 문제가 있었으니, 이런 정보를 미리 주위에서 듣고 온 놈들은 이미 논산에서부터 이런 사태에 미연에 대처하기 위해 멀쩡한 눈을 마이너스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고 안다. 하지만 순진한 친구들은 그것도 몰랐으니, 그리하여 내일 JSA 선발이 있다고 예고된 그날을 앞둔 전날, 그 대상자가 될 법한 친구들은 부랴부랴 안경잽이인양 가장하고 나섰으니, 하지만, JSA 그 친구들이라고 바보일쏘냐? 


그리하여, 키 180 이상 되고 안경 쓰지 않은 친구들은 전날 밤 안경쓴 친구의 안경을 빌려 꾹 눌러쓰고 잠을 자야만 했다. 왜? 그래야만 콧잔등 위에 안경 자국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콧잔등 위 안경자국이 짙을 수록 이 친구는 평소에도 안경을 쓴다는 보장을 받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처럼 그때 JSA는 우리에게 공포였다. 물론 나야 키가 180에 훨씬 미치지 못했으니 그 걱정이야 덜었으나 키 180이상으로 안경을 쓰지 않은 친구들은 내 기억으로는 대체로 JSA로 끌려갔다. 그렇지만 누가 봐도 저 친구는 JSA 조건을 만족한다 했지만 의외로 탈락한 친구도 있었으니, 그때야 오죽 이른바 '백' 문화가 작동할 때인가? 이런 친구들은 사돈에 팔촌까지 각종 연줄을 동원해 힘 있는 사람들을 빌려 잘도 위기를 타개했던 것이다. 


한데 이 JSA는 묘한 구석이 있다. 분명 개중 대부분은 비자발적으로 그곳에 개끌려 가듯이, 도살장 끌려가듯이 했으나 그곳 생활 얼마 뒤면, 그 출신이 카투사라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지워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서 카투사는 그림자도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한국군이라는 깊은 각인만이 아로새겨질 뿐이다. 


물론 개중 어떤 이는 나처럼 기냥 편안히 군대생활하면서 미군들과 노닥거리면서 영어도 배우는 이런 생활이 부럽기는 했을 터이지만, 그들은 절대로 카투사라는 기억을 말살해 버린다. 그렇게 투철하게 그들은 누구보다 처절한 한국군이 되어갔다. 그 과정만큼 미국에 대한 증오 역시 커져만 갔으니, 매일 새벽 구보 때면 언제나 미군 막사를 향해 한국 군가를 불러대게 한 그 KRTC 교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얼마전 JSA 병사 몇 명이 익사했다 한다. 그 소식에 갑자기 그 옛날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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