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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MB-이건무 스핀오프] MB 방문 한달 전 내가 찾은 지산동 73호분 발굴현장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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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이명박이 들른다는 소식에 만사 제끼고 달려간 문화재청장 이건무는 막상 MB가 박물관 앞에 도열한 이 지역 주민 환호 갈채에 취하는 바람에 막상 발굴현장 방문은 건너띄게 되자 뻘쭘해졌다는 이야기를 앞서 이야기했거니와

그 발굴현장을 MB 방문이 있기 한달 남짓 전 나는 직접 찾았다. 그 생생한 르포 기사를 온전히 전재하겠거니와, 아래서 보듯이 그때가 4월 10일이라, 이미 그때 MB 방문은 예정돼 있어 발굴단이나 이를 의뢰한 고령군, 그리고 현장을 대리 관리하다시피하는 고령군립 공립 대가야박물관도 그쪽으로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당시 사정을 비교적 잘 기억하는 이곳 박물관 베테랑 학예연구사 손정미는 당시를 회고하며 한달 전부터 보안검색하느라 난리를 쳤다고 기억한다. 

또 하나 저와 같은 MB 발굴현장 쌩까기 소식이 당시 지역사회에서도 그 원인을 두고 인구에 회자한 듯, 거창군 학예연구사 구본용 기억에 의하면, MB가 사사건건 사대강 운하를 비롯해 자신의 국책 사업을 잡으려 하는 고고학 혹은 문화재가 싫어서 일부러 발굴현장 방문을 안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루머가 사실이 아닐 것으로 나는 보지만, 아무튼 저런 말이 돌았다는 것 자체가 그 시대상 하나를 증언한다는 점에서 채록해 둔다. 
 

73호분 발굴현장에서 나를 맞은 대동문화재연구원장 조영현

 
2008.04.10 17:42:22
<1천600년만에 속살 드러낸 대가야 고분>
고령 발굴현장 대가야축제 때 일반 공개

(고령=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일인 10일, 경북 고령에는 오전 10시 무렵을 넘어서자 봄비 치고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가야 시대 대형 봉토분 수십 기가 높은 능선 정상을 따라 병풍처럼 두른 계곡 안쪽을 차지한 대가야박물관. 그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 바로 오른쪽 능선이 끝나는 두 지점이 경북 고령군 의뢰로 대동문화연구원(원장 조영현)이 한창 고고학 발굴 조사를 진행 중인 곳이다. 
하지만 이날은 비 때문에 발굴장에 유적 보호를 위한 거대한 보호천막이 설치돼 있었다. 이 중 한 곳은 이런 악천후에도 발굴현장을 공개하기 위해 비닐하우스 식 천막 시설을 쳐 놓았다. 

질펀거리는 황토를 밟으며 지름 20-30m 가량 되는 원형 무덤 봉분을 덮은 거대 보호천막 안으로 들어서니 지하 3m 바닥 깊이까지 완연한 모습을 드러낸 대형 고분 중심부가 떡 하니 나타난다. 
 

내가 찾았을 때 73호분 주곽 바닥.



뚝 떨어진 기온. 비바람이 천막을 내리치면서 투닥투닥 내는 소리에 묘한 기분이 든다. 하기야 이 천막 안은 주검을 위한 공간인 무덤이고, 더구나 그것이 속살까지 드러났으니, 한편으로는 을씨년스럽다. 

이곳이 맞은편 75호분과 함께 이번 조사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또 다른 대형 봉토분인 73호분이다. 

현장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발굴조사를 지휘하는 조영현 원장은 "오늘 아침에도 조사를 하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서둘러 천막을 쳤다"면서 "고분 규모가 워낙 크고 도굴 시도가 더러 이뤄지긴 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한 까닭에 '상당한' 성과를 기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금관이나 금동관 같은 유물 출토도 기대했다는 의미인 듯했다. 

그럼에도 이번 발굴은 같은 지산동 고분군 중 1977년 조사한 제44·45호분 이후 30여년 만에 재개한 대가야 왕릉급 고분 발굴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 고고학계 주목을 한몸에 받고있다. 
 

내가 포착한 73호 주곽 바닥

 
그에 걸맞게 조사대상 고분 유적 중 73호분은 규모가 봉분 주위를 원형으로 빙 두른 호석렬(護石列)을 기준으로 지름 23m에 이르며, 75호분은 타원형에 가까운 지름 26-28m로 나타났다. 두 고분은 세부적인 차이가 보이긴 하나, 기본 골격에서는 닮았다. 

조 원장에 의하면 73호분이 '목곽 봉토분'(木槨 封土墳)인 반면, 75호분은 수혈식 석실분(竪穴式 石室墳)이다. 

하지만 두 고분은 공중에서 내려다 본 평면 묘광 형태가 모두 T자형이다. 즉, 무덤 주인공을 안치하기 위한 주곽(主槨)이란 공간은 동-서 방향으로 장축을 둔 장방형으로 마련하고, 그 서쪽 끝에는 대형 토기를 비롯한 각종 기물을 빼곡히 넣어 두기 위한 창고와 같은 시설인 부장곽(副葬槨)을 남-북 장축 방향으로 설치한 것이다. 

이 중 73호분이 주곽과 부장곽 안에 나무로 짠 덧널을 별도로 안치한 반면, 75호분은 이런 목곽(木槨) 시설 없이 그대로 돌을 쌓아 그 공간을 활용한 점이 다른 셈이다. 

73호분은 주곽과 부장곽 모두 바닥 조사까지 사실상 완료됐다. 다만 이 무덤은 또 다른 '데뷔'를 위해 한창 단장하는 중이다. 조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포착한 73호 주곽 바닥

 
"고령군 주최 제4회 대가야체험축제가 11일부터 14일까지 열립니다. 올해 주제가 '무덤의 전설'입니다. 이 축제 기간에 우리 발굴현장의 모든 것이 일반에 공개됩니다. 우리가 발굴조사를 벌이는 광경도 그대로 공개됩니다. 시대가 그만큼 바뀐 것이지요. 접근금지라는 위압적인 팻말을 세워 놓고, 높은 담장을 쳐 놓고 발굴하던 시대는 갔습니다. 문화유산은 시민과 함께 해야 살아남습니다. 발굴하고 보존처리까지 거친 유물을 박물관 유리진열실 안에서  구경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에 조사단은 장기간 노출되면 훼손 우려가 있는 일부 유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출토 유물을 바닥면에 노출된 그 상태로 일반에 공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1천600년만에 다시금 속살을 드러낸 대가야 시대 왕릉급 무덤이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관람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시설물들은 치우고, 무덤 바닥과 주변 일대도 대대적인 정리를 시작한 것이다. 

이에 의해 73호분 주곽 바닥에는 모두 5자루에 이르는 환두대도와 운주ㆍ재갈 등의 마구류가 그대로 박혀 있고, 부장곽에는 무수한 토기가 완형, 혹은 깨진 상태로 발견 당시 모습대로 놓여 있다. 

하지만 축제가 가까워질 수록 조사단과 대가야박물관은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다. 신종환 대가야박물관장의 말이다. 

"예년 추세대로라면 올해 축제에도 10만명이 몰려듭니다. 보다시피 우리 박물관과 발굴장에 그 많은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습니다. 발굴현장 공개는 취지는 좋지만 안전사고 우려가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강구하고 있습니다." 
 

아래쪽이 부장곽, 위쪽이 주곽인 73호분 매장주체부

 
 
하지만 6월 중순까지 예정된 이번 발굴조사에서 조 원장이 정작 주력하는 대목은 무덤의 축조 과정 규명이다. 

이를 위해 조 원장은 '8분 계단식' 조사방법을 택했다. 즉, 봉분을 8개 구역으로 크게 쪼갠 다음, 각각의 구역을 다시 계단식으로 한칸 한칸 벗겨내는 조사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조사는 이보다 더 세밀해 양파 껍질을 한겹씩 벗기듯 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를 통한 조사성과에 조 원장은 일단 '만족' 판정을 내렸다. 

"73호분은 봉분을 조사해 보니 22개에 이르는 섹트(구간)가 확인됐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22개 조직이 각기 일정한 구역씩을 분담해 봉분을 축조했다는 뜻입니다. 한데 이 구간들마다 정성을 들인 정도가 확연한 차이를 보입니다. 대강대강 쌓은 곳도 있고, 아주 치밀하게 조성한 곳도 있습니다. 대충 쌓은 곳을 담당한 조직은 땡땡이를 친 셈이지요. 75호분은 20개 조직이 분담해 무덤을 축조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나아가 더 많은 정보를 캐 내기 위해 사진 촬영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 생각으로는 약 1만장의 사진 자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대체로 해가 뜨기 전에 풍선을 띄우고 물을 뿌린 다음에 촬영합니다. 태양광이 들어오면 많은 정보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73호분. 대동문화재연구원 제공

 
이에 의해 두 고분 봉분 주변을 두른 호석렬 '꼭지점'도 찾아냈다. 즉, 공중 촬영 사진자료를 판독한 결과, 이 호석렬이 어느 지점에서 출발해 어느 방향을 따라 출발점으로 되돌아왔는지를 밝혀낸 것이다. 조 원장이 두 봉분의 공중 촬영 사진 중 꼭지점으로 지목한 곳을 보니, 신기하게도 그 지점 호석렬은 외부로 약간 돌출되어 있었다. 
조 원장은 "출토 유물이나 무덤 축조방식으로 보아 두 고분은 수십년 정도 축조시기가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이 꼭지점 위치가 똑같은 것으로 드러난다"고 말했다. 

나아가 조 원장은 이렇게 학술발굴을 거친 유적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문화재청을 비롯한 관계 당국의 지침이나 정책은 미리 나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사가 진행된 73호분. 대동문화재연구원 제공

 
"왜냐하면 그 활용 방식에 따라 조사방식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래처럼 조사를 끝내고 유물을 수습하고는 유적을 본래 모습 그대로, 혹은 원형에 가깝게 복구한다면야 모를까, 그 내부 구조까지 보여주는 방식으로 전시가 이뤄진다면, 발굴조사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진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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