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년 86세로 오늘 타계소식을 전한 안휘준 선생은 오척 단신이지만 언제나 단단한 인상을 주었으니
선생이 혹 젊은 시절 스포츠광이거나 스포츠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체구에서 오는 풍모는 딱 레슬링 혹은 럭비선수 그것이었으니
적어도 그런 풍모는 같은 고고미술사에서는 실제 럭비 선수 출신인 고 정영호 선생의 그것과 흡사했다.
그러고 보면 해방 이후 1세대 고미술학도라면 자고로 저리 단단해야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1세대 고미술학도는 실상 전공이 따로 있다 하기 힘들어 건딜지 아니하는 미술 분야가 없기는 하고, 고인 역시 예외가 아니라 하겠지만 선생은 주로 회화에 천착했다.
다 건딜어야 하는 저 전공 불문성 중에서도 그의 주력 분야라 할 회화로 국한하건대 전 시대를 통괄해서 솔거 담징 이래 근현대까지 건딜지 않은 그림이 없다.
선생은 중동고 출신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1회 입학생이라 1961년 학과 창설 당시 첫 입학생 열두 사제 중 한 명이라 은사는 삼불 김원용[김원룡]이었으니 저 학과 신생이라 그런 것도 있지마는 교수는 꼴랑 삼불 한 명이라 혼자서 고고학과 미술사학 두 분야를 말아드셨다.
그 1회 입학 동기생은 2회와는 극히 다른 길을 가는데 2회가 약속이나 한 듯이 모조리 관으로 빠진 것과는 달리 거개 교직에 정착했거니와
선생 역시 홍익대를 거쳐 모교로 가서 미술사를 가르치다 정년 퇴직했다.
입학동기생 중 미술사는 아마 당신 혼차 아니었나 싶고 나머지 김병모 임효재 정영화 손병헌 선생은 모조리 고고학으로 탈출했다.
선생은 서울대 출신에 고고인류학과 1회 졸업생으로 미술사로선 성골 격인 홍익대랑 서울대서 줄곧 교편을 잡은 까닭에 뚜렷한 학맥을 형성하게 되니 실상 그 이후 한국고미술학을 양분하는 한 쪽 수장이 된다.
그 나머지 절반이 숙명의 라이벌 문명대 선생이라 동국대 출신으로 한국고미술 절반을 차지하는 불교미술을 실상 문명대 선생이 독식하다시피 한 반면 선생은 홍익대 서울대를 배경삼아 그 자신은 회화를 천착하나 후학들은 여러 분야를 아우르게 된다.
물론 저리 단순화하면 섭섭해할 쪽도 있을 수밖에 없어 예컨대 진홍섭 선생 휘하에서 도자사 분야 지울 수 없는 족적을 개척한 이화여대 미술사 등등이 있거니와
그럼에도 하도 선생과 문 선생이 실로 반세기 가까이 서로의 맹주를 자처하는 통에 한국고미술학은 저 두 거성을 중심으로 동서 분당 같은 경쟁 구도를 형성한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선생 일생을 간단히 정리하면 연구와 제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행복한 삶이다.
둘 다 극강을 구비했으니 이건 문 선생도 마찬가지다.
학문이야 그 무수한 논저로 충분하거니와 저 제도라는 측면에서 1세대라는 희귀성 그리고 저 학적 배경을 발판으로 학문 권력 최정점을 내려온 적 없으니 경력으로 보건대 저 경력으로 할 만한 모든 직책 관직 중 국립박물관장과 문화재청장 빼고선 다 했다.
내 기억에 문화재위원으로만 수십년을 있었을 것이요 문화재위원장을 지내고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각종 정부 운영자문위원이나 위원장으로 안해 본 일이 없다.
보통 이런 사람을 권력지향 폴리페서라 부르지만 내가 지난 삼십년을 지켜본 그는 철두철미 서생이었다.
그는 시종 그 자신 연구자라는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학자로서의 신념 또한 아주 투철해서 이와 관련한 사회정치사안에서는 연구자로서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점에서 그는 딸각발이 선비였다.
이런 그를 후학들은 당연히 어려워했으니 특히 퇴임 이래 학술대회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 훈시하는 모습들은 특히 논란이 되곤 했다.
그는 무섭도록 후학들을 훈시하고 아주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이것도 연구냐는 말을 아예 공개된 자리에서 자주 하곤 했으니 이 또한 이 시대에 회초리를 드는 선생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으리라 나는 본다.
몇년 전부터 거둥이 아주 안좋다는 말이 들리더니 영면에 들었다 한다.
*** [첨언] ***
조선일보 허윤희 기자 보도에 의하면 고인은 1985년부터 24년간 연속 문화재위원(현 국가유산위원)을 맡았고, 8년간 동산(動産) 문화재 분과위원장, 4년간 문화재위원장을 지냈다.
2012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아 2016년 9월까지 해외 문화유산의 환수 및 연구·조사에 힘썼다고 한다.
저리 한 사람이 오래 같은 자리를 지킨다 함은 그만큼 학적 두께가 얇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NEWS & THESIS'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789년 호주 원주민을 몰살한 천연두는 인니 원주민이 아닌 영국이 가져왔다 (0) | 2026.07.21 |
|---|---|
| 3,400년 전 키프로스 금세공인들은 어떻게 고대 문화를 융합했을까 (0) | 2026.07.21 |
| 이집트 신왕국 시대 고위 관리 무덤 세 곳 사카라서 발굴 (1) | 2026.07.20 |
| 7천년 전 노르웨이 산악 수렵채집인들은 송어를 고산지대로 옮겨 키우고 그물을 쳐서 잡았다! (0) | 2026.07.20 |
| 카라한테페 지하엔 무엇이? 12,000년 된 돌로 봉인한 방 곧 공개 (0) | 2026.07.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