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같은 소백산맥 기슭 산촌 출신은 환경에 특히 더 민감해서 생경한 풍경을 만날 때마다 대뜸 이곳이 농사 짓기에 좋은 땅인가 아닌가를 본다.
만경평야..놀란다. 논이라 해 봐야 천수답이 전부인 줄 안 나 같은 놈한텐 끊임없이 펼쳐지는 비옥한 충적 평야가 부러울 뿐이다.
그래 산이 안 보이더라.
문젠 그 다음.
농업 근대화 이전으로 돌아가 이 넓은 땅을 농토로 일군다? 웃기는 얘기다. 이 넓은 땅을 누가 소로 간단 말인가?
다음. 지금이야 수리시설이 잘되어 있지만, 전근대로 돌아가서 이랬을까? 웃기는 짜장이라, 이 드넓은 평야는 실은 범람지대라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 광대무변한 풍광과는 달리 나한테는 영 좋지 아니한 땅이었다.
다음.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호남 내륙 준평야지대.
흙을 보니 이건 뭐 헐벗은 논 영양분 보충할 때면 깔아주는 누른 진흙이 끊임없이 펼쳐지는데, 여긴 언덕배기 비슷해서 와 홍수에 잠길 우려가 거의 없는 곳이다.
딱 보니 이런 데는 고구마 농사 짓기에 좋을 테고 콩농사도 좋고 다 좋다.
신이 내린 땅이더라. 나주나 고창 같은 데서 이런 땅을 많이 봤다.

부여 송국리 유적을 처음 갔을 때다.
세상에 나! 딱 보니 이런 데가 천국이다.
전반하는 풍모를 보니 평야지대에 가깝지만, 산이라 부를 수 없는 언덕배기라, 나 같음 이런 언덕배기 볕이 잘 드는 데다가 살 곳을 만들고, 나머지 구릉성 산지에다가는 논 만들고 밭 만들어 벼농사 짓고 잡곡 농사 짓겠다고 생각했다.
더 구체로 보면 아래쪽 물이 가까운 데다가 간단한 보를 만들어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지었을 테고, 위쪽 물대기 곤란한 데다가는 밭을 만들어 잡곡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괜히 이런 데서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이 나오겠는가?
현장을 보면 딱 그런 데다.
토질은 내가 자신이 없으나, 그런대로 괜찮을 성 싶었다.
이 정도라면 비료만 제대로 주면 휴경도 필요없을 곳이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실제 발굴성과를 봐도 이미 청동기시대에 이곳은 쌀농사를 지었음이 확실하고 그에 더불어 조 수수 기장 같은 잡곡농사도 결합했다는 증좌를 보인다.
산업화 근대화 이전 농경을 생각할 적에 언제나 고려해야 하는 것이 첫번째가 토질이고, 두번째가 홍수 범람 여부이며, 세번째가 인력으로 통제 가능한 환경(곧 면적)인가 여부다.
당시에는 소를 이용한 농경이 도입되기 전이었으니 거의 모든 바탕이 인력이었을 것이어니와, 그렇다 해서 그 넓은 주변 언덕배기 일대 전부를 농사지어 일구었겠는가?
이 문제는 이 일대를 통제했을 송국리 집단 인구 규모와 연관하겠거니와
그 유적에서 예컨대 집이 100채 나왔다 해서, 그 시절에 100채가 되는 집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시대를 달리해서 중첩한 집채가 있기 마련이라,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시대에 존재한 집채를 확인해야 하는데, 이것도 고고학의 시간과 실생활의 시간은 왕청나게 다르다.
동시대로 보인다는 말은 고고학의 시간과 실생활의 시간이 다르다.
저 시대 한국고고학은 100년 단위로 끊지도 못한다.
삼국시대 들어와서는 50년 단위로도 짜르고, 25년 단위로도 요새 짜르더러만(이것도 실은 허무맹랑한 시도다. 난 믿지 않는다) 송국리 시대로 들어가 100년 단위로 짜른다? 미친 짓이다.
이는 곧 동시대 집채로 보여도, 실제 그런 집채들이 동시대에 병렬로 존재했는가는 별개 문제라는 뜻이다.
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왜 꺼내지? 화장실서 볼 일 보다가 각중에 생각나서 긁적거린다.
요새 하도 반달돌칼에 휘말려들어서인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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