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새는 기와 연구자도 폭증하고 관련 학회까지 등장했거니와, 그 이전 기와 연구자라 하면 2파전이라, 국립박물관 김성구 선생과 국립문화재연구소 최맹식 두 양반이 다 말아드셨다.
이 기와는 한국고고학에서는 고대국가 성립론과도 결합하는 모습을 노골로 보였으니, 간단히 정리하면 기와를 쓰야 어엿한 고대국가라 할 수 있다, 뭐 이런 논리로 이해하면 대과가 없다!
고구려는 좀 달라서 워낙 중국과 일찍부터 접촉한 관계로다가 일찍부터 기와를 썼고, 문제는 백제와 신라.
신라 쪽은 요새는 조금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진흥왕 시대를 고비로 이때부터 기와 사용이 이른바 고급 건물에 일반화한다 뭐 이런 식의 통설이 자리잡았다고 기억한다.
이런 점에서 황룡사 창건은 획기였다.
문제는 그래도 이른바 신라의 고대국가 성립과 기와 사용은 격차가 여전히 많이 난다. 이 점이 고민이라면 고민 아닐까 한다.
다음 백제.
김성구 선생이 한국기와 개설사를 낸 적이 있다. 대원사 빛깔있는 책 시리즈 하나가 아니었나 한다.
흔히 백제를 그 수도에 따라 한성기, 웅진기, 사비기로 삼분하거니와 웅진기 이후에는 논란이 없다. 기와? 졸라 많이 나온다.
문제는 한성기에 기와를 썼느냐?
이게 회의적이었다.
살펴봐야 하겠지만 한성기 기와라 해서 김성구 선생 책이 다룬 것은 그 족보도 알 수 없는 삼성동토성 출토 와당 꼴랑 한 점 아니었던가 기억하며, 기타 석촌동 고분 기와 한두 쪼가리 다루지 않았나 기억한다.
암튼 당시 결론은?
한성기에는 기와가 등장했다 해도 극히 한정적이었다!
딱 이것일 것이다.
그러다가 사정이 일변했다.
풍납토성에서 기와가 쏟아진 것이다.
특히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미래마을 지구 발굴은 더는 한성기 기와 사용을 두고선 이론까지 아예 없애버렸다.
물론 그 직전 권오씨가 발굴한 경당지구에서도 그런 기미는 보이기는 했지만, 그 코앞 미래마을에서 기와만 해도 수백 상자 쏟아진 것이다.
이제 끝났다.
한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언제인지 정확히 내가 기억은 하지 못하겠는데, 과거 석촌동 무덤 발굴을 말아먹은 서울대박물관이 풍납토성 발굴이 한창 이뤼지고, 기와가 쏟아지고 나서 뒤늦게 그 발굴보고서인지? 아니면 미정리 유물 보고서를 호화 칼라판으로 냈다.
그 보고서를 보고선 내가 기가 찼다.
70년대 석촌동 고분에서 한성기 백제 기와가 쏟아진 것이다!
얼마나?
그 보고서 혹 옆에 있는 분은 살펴봐라!
기와가 수백 상자 수십 상자 분량이었다.
그걸 단 한 놈도 정리하지 않고 꼬불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성백제 기와?
이미 석촌동 고분에서 쏟아져 나와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찌하여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빚어졌던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데 저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들한테 나중에 들은 말들이 가관이라, 이르기를 저 기와 조까리들, 시위 때 짱돌로 썼다나 어쨌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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