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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새로 발견된 관룡사 각석에서 모름지기 고려해야 하는 문제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6.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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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 삼강문화대연구원(소배경) 제공


창녕 화왕산 기슭을 정좌한 고찰 관룡사는 나랑도 인연이 남다른 곳이라 다른 무엇보다 2009년 당시 그것 용선대 석조불 대좌에서 이 불상 혹은 대좌를 개원開元 10년, 곧 서기 722년에 만들었다는 새김글자를 확정하고선 그 사실을 내가 맨처음 만천하에 공포했더랬다.

마침 오늘 그곳에서 조촐한 자리가 마련되어 토론자 비스무리하게 초대되어 김천에서 두 시간가량 차를 몰아 도착했거니와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마침 그곳에 포토바이오가 와 있는지라 자초지종 캐니 바로 전날 창녕군 의뢰로 관룡사 주변 지역 문화재 조사를 한 삼강문화재연구원이 그 일환으로 신라말기 토지 공증 문서를 새긴 석각 자료를 발견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공지됐으니 그걸 촬영하겠다고 기어이 오세윤 형이 사진 장비 잔뜩 구비하고선 나타난 것이다.


관룡사 토지 관련 문서 각석 탁본. 창녕군 삼강문화재연구원 소배경 제공


문젠 이 소식이 공지되기는 했지마는 주지 스님 이하 관룡사에서도 금시초문이라 아무도 그 석각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할 수 없이 내가 총대를 맸으니 결국 저 연구원 소배경 조사부장을 유선으로 호출하고선 그 석각이 소재하는 정확한 위치를 탐문하매 소 부장이 그 찾아가는 방향을 상세히 일러준다.

보니 관룡사 경내이기는 한데 그 야외 화장실을 준거로 삼고 사찰을 왼편으로 끼고선 곧장 사찰을 병풍처럼 두른 화왕산 정상을 향해 곧장 산정 방향으로 치고 올라가면 나무숲에서 만난다 하거니와

이 말을 듣자마자 오작은 이 무더위 대낮에 그 무거분 사진장비 잔뜩 쟁이고선 각석을 찾아 수풀속길로 표표히 사라지고 나는 관련 행사를 소화했더랬다.


이 무더위에 저 장비를 메고..작가 오세윤


오작은 행사가 끝날 즈음 막 촬영을 끝내고선 하산하는 길에 조우했으니 땀으로 범벅인 상태였다.

나는 오르지 않았다. 이미 그런 열정이 사라진지 오래요 무엇보다 땀벅이 되기는 싫었고 덧보태어 전날 들깨 모종 내는 일로 이미 몸이 만신창이라 도저히 오를 형편도 되지 못했다.

다만 오작이 둘러보고선 일러준 현장 사정이 심상치 아니한 듯해서 그의 전언을 정리한다.

첫째 관룡사 위치. 나는 지금의 관룡사가 본래 자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오래전부터 했거니와 지금 위치는 산곡을 막아선 형국이라 이런 데다 제정신인 사람들은 절간을 만들지 않는다.

사태나면 몰살한다.

한데 이번 각석이 발견된 지점과 그 주변 일대가 넓은 대지가 있어 오작이 보기엔 이곳이 절터였음을 직감했다 하며, 바로 이곳이 관룡사 자리가 아닌가 했다 하거니와 그럼 그렇지 내 막연한 의심이 사실일 수도 있음을 알았다.

둘째 저 문제의 석각은 그 옛날 절터 경내라 한다.

이는 저 문서 신빙을 따질 때 매우 중대한 항목이라 주시하지 않을 수 없거니와 이를 통해 나는 저 문서가 왜 저 자리 있을까 하는 의심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현장을 확인하지도 않았고 저 문서 내용을 숙독한 것은 아닌 상태에서 나는 과연 저 석각이 조사단 발표대로 취신해야 하는지를 의심했다.

첫째 석각 상태. 너무 좋다.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하나도 없다.

천년된 문서라기엔 의심할 만했다.

둘째 문서 내용과 석각위치의 불합치성.

조사단 발표대로라면 저 문서는 토지 공증 문서인데 그런 공문서를 누가 아무도 가지 않는 돌팤에다 새긴단 말인가?

셋째 서체. 보고들은 것이 짧아서 9세기 무렵 저런 서체가 나로선 무척 생소하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저 각석은 일단 의심을 해 본 것인데 저런 의심 상당 부문이 오작 전언을 통해 풀렸다는 말은 해둔다.

나는 무엇보다 본래 관룡사 자리가 저곳이라면 왜 저기에 저런 내용을 새겼는지 비로소 이해한다.

다만, 그렇다 해서 저런 의심들이 말끔히 해소됐다고는 할 수 없다.

못내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앞으로 좀 면밀히 살피고자 한다.

혹 저 문서를 검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현장 확인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와 같이 적기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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