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부여 왕흥사지에서 당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그 목탑 터를 발굴하고선 이 탑 내지는 사찰 자체를 백제 위덕왕 시대에 세웠다는 근거 자료를 확보했을 때였다.
다른 무엇보다 그 목탑 사리공에서 그것을 밝혀주는 사리장엄구가 드러나고, 그 심초석 주변으로는 고고학에서는 지진구 혹은 진단구라 치부한 부처를 위한 공양품이 잔뜩 나왔으니, 발굴 직후 나는 그 의미를 분석한 논문을 곧바로 써서 투고했으니 그것이 바로 다음이다.
김태식, 부여 왕흥사지 昌王銘 사리구에 관한 고찰 : 舍利函 銘文을 중심으로 《한국문화사학회》 28, 2007
저것이 왕흥사지 사리장엄에 대한 국내 첫 분석논문으로 기록되는데, 문제는 저걸 탐구하면서, 특히 심초석 주변 유물들이 지진구 진단구가 아님을 나는 역설하면서 이참에 도대체 불교에서 탑塔이란 무엇인가를 본격으로 파봐야겠다 했으니
저 논문을 혹 열람하시는 분은 알겠지만, 그 말미는 온통 탑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동아시아에 들어와서는 어떻게 인식되고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저 논문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대목 중 하나가 바로 탑이란 무엇인가였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했는가?
저 탑 혹은 탑파 신앙에 대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글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불교에서 탑이란 무엇인가를 천착한 글 한 편 없었다.
탑이란 글 뒤져보면 온통 양식 타령뿐이었다.
믿기는가?
탑이란 무엇인가를 논한 글이 단 판 편도 없었다는 사실이?
없다!
단 한 편도 없었다.
모조리 탑이라 해서 주어진 무엇이라 해서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곳이라는 일반론밖에 없었고 기타 우수마발은 모조리 양식 타령이었다.
참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퍼부어 정리했으니, 그것이 애초 후한시대 중국에 수입될 적에는 원분圓墳인가 하는 이름으로 들어왔으며, 그래서 동시대 중국 무덤과 연동했음을 밝히기도 하고
나아가 각종 사전, 특히 일체경음의를 중심으로 탑이라는 항목을 적출하고는, 그것의 동아시아적 전개 양상을 추적해 정리했다.
이후 단국대에서 저 문제를 전론으로 접근한 석사학위 논문 한 편이 제출됐다.
이 친구 이름을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논문을 보고선 나로선 이제 내가 더는 이 문제를 천착할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해당 논문은 아마 방유리 선생인가가 그 친구한테 연락해서 그 친구가 나한테 우편 송달하지 않았나 기억한다.)
당시 저 문화사학은 박경식 선생이 회장으로 있었고, 서영일 선생과 방유리 선생이 많이 간여할 때라, 그런 인연으로 곧바로 왕흥사지 사리장엄 논문을 싣게 되었으니,
저 해당 잡지 표지 사진이 바로 내가 부여연구소에서 직접 찍은 사리장엄 청동용기다. (표지 사진 이야기지만, 당시에 이미 사진 저작권 문제가 민감하게 작동할 무렵이라, 관련 도판들을 제공하니 박경식 선생이 이게 너가 찍은 것들이냐? 확인이 와서 새삼 놀랐다는 기록을 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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